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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사회

청년 주거-취업난 등 ‘현실판박이’… “사회적 관심이 설아를 살려요”[박성민의 더블케어]

입력 2021-11-13 03:00업데이트 2021-11-14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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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8명이 2년 5개월 걸쳐 제작… 20대 고시원생 최설아 자살심리
주변인 말과 행동따라 영향받아… 죄책감 등 보호자 심리도 보호대상
탄탄한 구성-입체적 캐릭터 눈길… 참가자 태도따라 다른 결말 낳아
9일 서울 마포구 작업실에서 만난 ‘더브릭스’ 팀원들은 게임을 기획하고 제작한 2년 5개월을 “‘올바른 관심은 누군가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가치를 공유한 시간”이라고 돌아봤다. 왼쪽부터 김지윤 씨, 이혜린 대표, 권은령 씨. 현재 iOS와 PC 버전을 준비 중인 더브릭스는 사회 문제를 다룬 다음 작품도 구상 중이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1만3195명.

지난해 국내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 수다. 전년 대비 자살률(인구 10만 명당 자살자)은 4.4% 줄었다. ‘코로나 블루(우울감)’라는 악조건 속에서 언뜻 선방한 것처럼 보이지만 안도할 수만은 없다. 고립감, 취업난 등에 시달리는 젊은층의 정신건강은 오히려 더 나빠졌다. 10대와 20대 자살률은 각각 9.4%, 12.8% 급증했다. 10대 남성(18.8%), 20대 여성(16.5%)의 증가율이 특히 컸다. 전문가들은 자살을 ‘사회적 타살’이라고 부른다. 사회 구조적 문제, 물리적·정신적 폭력 등 외적 요인이 극단적 선택에 영향을 끼친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들을 살리는 힘 역시 외부에서 온다. 이상 징후를 감지한 가족이나 친구의 따뜻한 말 한마디, 적절한 개입이 극단적 선택을 막는다. 보건복지부 산하 중앙심리부검센터에 따르면 자살사망자의 92%는 주위에 ‘위험 신호’를 보냈다.

올 8월 말 출시된 모바일 게임 ‘30일’엔 이 모든 메시지가 담겼다. 게임은 출시 두 달 만에 누적 다운로드 수 1만 건을 넘었다. ‘대박’은 아니지만 ‘자살 예방’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감안하면 꽤 괜찮은 성적표다. 공식 팬 카페 가입자가 거의 2000명에 이를 만큼 마니아층도 생겼다. 심심풀이로 시작했다가 울면서 끝냈다는 후기가 많다. 제작자는 대학생 연합 게임 동아리 ‘브릿지’에서 만난 20대 청년 8명이다. 2019년 3월 팀을 꾸린 뒤 완성작을 내놓기까지 2년 5개월이 걸렸다. 9일 서울 마포구 작업실에서 제작사 ‘더브릭스’의 이혜린 대표(27)와 기획자 김지윤 씨(26), 프로그래머 권은령 씨(23)를 만났다. 팀명은 “살면서 맞닥뜨리는 벽의 벽돌(brick) 하나라도 부술 수 있는 게임을 만들자”는 의미다.

(※이 기사에는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돼 있습니다. 하지만 기사를 읽어도 사용자 선택에 따라 결말이 달라져 게임을 즐기는 데엔 지장이 없습니다.)

○나는 왜 설아의 죽음을 막지 못했나

설아의 방(위 사진)은 게임 참가자들이 설아의 심리 상태를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시든 화분, 널브러진 약통 등은 위험 징후다. 각자 다른 곳을 보고 있지만 끈으로 이어진 등장인물들은 “우리는 모두 연결돼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더브릭스 제공
게임은 ‘최설아’라는 20대 여성의 사망진단서를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사인은 약물 과다 복용, 사망 장소는 허름한 3층짜리 고시원이다. 설아는 3년째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인 공시생이다. 참가자는 고시원 총무인 ‘박유나’가 돼 설아의 죽음을 막아야 한다. 설아의 사망 30일 전에서 시작해 매일 새로운 미션이 주어진다.

이때 유나와 주변인들의 말과 행동에 따라 설아의 심리상태는 안정을 찾을 수도, 악화될 수도 있다. 전자일 땐 사망진단서가 조금씩 소각돼 생존 가능성이 높아지지만, 후자의 경우엔 설아의 사망으로 게임이 종료된다.

게임은 현실을 빼다 박은 것처럼 사실적이다. 팀원들은 고시원을 취재하고 주위의 공시생 등 우울감에 시달리는 청년 등을 인터뷰해 사실감을 높였다. 이 대표 등 팀원 2명의 고시원 거주 경험도 도움이 됐다. 이 대표는 “극히 개인적인 공간처럼 보이는 고시원 안에도 의미 있는 관심과 마주침이 있다. 당시 총무님에게 많은 위로를 받았다”고 말했다. 팀원들은 게임이 잘못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살예방 교육을 수료하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에게 자문도 했다. 김 씨는 “민감한 대사를 수정하는 데 몇 달씩 걸린 적도 있다”고 했다.

설아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다. 섣부른 위로가 상처를 더 헤집기도 하고, 별거 아닌 사건에 크게 흔들린다. 설아를 살리려면 참가자들의 세심한 관찰력과 신중한 언행이 필수다. 가령 감기에 걸린 설아를 걱정하며 1층 가판대에서 약을 사서 가거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상태 메시지 변경을 확인하고 한 번 더 안부를 묻는 식이다. 선반 위에 널브러진 약통, 시든 화분 등도 설아의 심리 상태를 알려주는 힌트다. 이 대표는 “(자살 고위험군에게) 반려식물이 죽었을 때의 상실감은 사람의 죽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조언을 듣고 반영했다”고 말했다.

고백하건대 기자는 설아를 세 번이나 지키지 못했다. 팬들이 블로그 등에 올린 엔딩 소개 글을 보고서야 해피엔딩을 맞았다.

○‘번아웃’ ‘죄책감’, 유나 이야기

설아를 살리는 것이 게임의 전부는 아니다. 밝고 긍정적인 성격으로 그려지는 유나 역시 ‘번아웃(burnout·소진)’의 위험을 안고 있다. 유나는 총무 일도, 시험 준비도 소홀히 하지 않으려고 자신을 몰아붙이다 과로로 쓰러진다. 설아를 신경 쓸수록 유나의 에너지가 깎이는 순간들이 있는데, 이는 ‘보호자들의 심리 상태도 함께 돌봐야 한다’는 메시지다. 자신의 정신건강을 챙기는 데 서툰 일반인들의 상당수는 여기에 해당될 수 있다.

유나의 존재는 극단적 선택을 한 이들의 유족 문제와도 겹쳐진다. 이들은 소중한 사람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에 시달린다. 삼성서울병원의 2018년 보고서에 따르면 이런 상황에 놓인 유족은 일반인보다 18.3배 더 우울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 대표는 “설아의 죽음을 최대한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그 책임이 유나에게 있다고 느껴지지 않도록 고민했다”고 말했다. 당초 사망진단서가 점차 구체적으로 완성되도록 기획했다가, 소멸되게 바꾼 것도 참가자들의 이런 감정선을 고려해서다.

유나가 설아의 정신적 버팀목 역할이라면, 옆방의 수아는 자살예방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는 장치다. 생명을 지키려면 따뜻한 위로만큼이나 과감하고 적절한 개입도 필요하다. 간호사로 설정된 수아는 설아의 자살 징후를 느끼고 방 안에 쌓인 약통을 치우도록 한다. 내원과 상담을 적극 권하는 것도 수아의 역할이다.

4주 차에 설아 방에서 약통을 발견한 유나에게 선택지가 놓인다. 약을 어디에 쓰려는지 궁금해하거나(간접적 개입), 더 이상 캐묻지 않는 경우, 자살 계획이나 생각을 하는지 직접적으로 묻는 경우 등 3가지다. 이때 자살 생각을 묻는 건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전문가들은 오히려 상대의 의중을 명확하게 물어야 고위험군을 발굴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 꿈을 잃은 세대에 바치는 위로

제작진은 고시원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통해 20대가 당면한 문제를 두루 살핀다. 주거 바우처 확대 뉴스와 스프링클러 설치 에피소드에선 청년 주거 문제를, 공무원 시험에 수년째 매달리는 주인공들을 통해선 부족한 일자리 현실을 얘기한다. 설아가 겪는 스토킹은 많은 여성들이 공감할 이슈다. 김 씨는 “스토킹은 꼭 남녀 관계가 아니더라도 ‘잘못된 관심’이 한 인간을 이렇게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치”라고 설명했다.

‘30일’은 몰입할수록 게임이라기보다는 한 편의 드라마 시리즈를 정주행하는 느낌을 준다. 입체적인 캐릭터와 탄탄한 이야기 구조가 주는 울림이 크기 때문이다. 대사를 곱씹는 팬들도 많다. 팬카페에는 게임에선 보기 힘든 활짝 웃는 설아의 얼굴 등 다양한 팬 아트도 올라온다. 삶의 무게를 버거워하는 설아를 위로하는 편지를 남기는 팬들도 많다.

마지막으로 세 명의 팀원에게 각각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나 대사를 꼽아달라고 요청했다. 그중 하나는 30일째, 유나가 설아에게 하는 말이다.

“완벽한 타인이라는 존재는 없는 것 같아요.”

서로에 대한 작은 관심만 있다면 누구도 혼자일 수는 없다는, 작품의 주제를 관통하는 대사다.

박성민 기자 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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