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께서 오늘의 한글 세상에 다시 오시면[김도연 칼럼]

김도연 객원논설위원·서울대 명예교수 입력 2021-10-07 03:00수정 2021-10-07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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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발명인 약 600년 전 한글 창제
조선 지배층 한문 사용에 존재감 잃기도
느낌마저 쉽게 전달하는 건 한글 사용 덕분
낮은 문맹률, 산업과 문화 융성에 기여
국제어 정확한 표현 위해 표기법 진화하길
김도연 객원논설위원·서울대 명예교수
10월 9일, 한글날을 맞는다. 쓰고 있는 문자를 스스로 발명한 민족은 세계에 우리밖에 없다. 한글은 더할 수 없이 과학적인 문자 체계로 우리 민족사를 넘어 전체 인류 역사에서 손꼽히는 위대한 발명품이다. 우리가 지닌 가장 값지고 자랑스러운 보물이 한글이다.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창제하며 간절히 바란 것은 국민 모두가 소통하며 서로를 이해하는 일이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심하게 갈등하고 있는 정치인들도 한글날 하루는 서로 보듬으며 지내면 좋겠다.

세종대왕께서 백성들을 위해 훈민정음을 만드신 것은 약 600년 전이다.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모든 사람들이 쉽게 익혀서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는 서문에서 알 수 있듯, 이토록 지극한 애민(愛民) 정신을 지닌 절대 권력자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한글이 아니라면 지금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대화에서는 “사람”이라 하지만 문서에는 “人”으로 표기하거나 혹은 “Saram”이라 쓰면서 살고 있을지 모르겠다. 실제로 터키나 베트남은 그들의 언어를 알파벳을 차용해 표기하고 있다.

한글 창제와 반포는 사실 세상을 바꾸는 위대한 혁명이었는데 아쉽게도 우리는 이를 수용하지 못하고 긴 세월을 보냈다. 한글은 1894년에야 우리 사회에서 공식 문자로 인정받았고 그 후 일제강점기에는 말살 위기에까지 몰렸다. 안타까운 우리 역사다. 역사에서 가정은 의미 없는 일이지만, 만약 초기에 세종대왕께서 좀 더 오래 한글 사용을 독려할 수 있었다면 우리 민족사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관리 선발시험에 훈민정음 과목도 추가했던 세종대왕은 한글 반포 4년 후 세상을 떠났고, 그 후 한글은 공식적인 존재감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누구나 배우기 쉽고 편히 쓸 수 있기에 다행히 사적인 영역에서는 한글의 명맥이 유지되었다. 17세기 초에 허균은 소설 ‘홍길동전’을 한글로 썼다. 반면 위대한 실학자 정약용이 19세기 초반에 저술한 ‘경세유표’ ‘목민심서’ 등은 모두 한문이었다. 이처럼 나라를 이끌던 양반계급 세계에 한글은 없었고 대다수 국민은 이런 문서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한문을 아는 지배자와 모르는 피지배자로 확연히 구분된 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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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에서도 개인적인 편지 같은 경우에는 일부 한글을 사용한 흔적이 있다. 정조(正祖)가 당대 이른바 노론 벽파(僻派)의 우두머리였던 심환지에게 보낸 초서체로 흘려 쓴 한자 편지에는 한글이 섞여 있는 “近日僻類爲뒤쥭박쥭之時(지금처럼 벽파의 무리들이 ‘뒤죽박죽’일 때)”라는 구절을 찾을 수 있다. “참으로 호로자식”이라는 거친 표현조차 “진호로자(眞胡盧子)”라고 쓴 정조이지만 뒤죽박죽이란 우리말이 갖는 생생한 느낌을 한자로 표현하기는 힘들었던 모양이다. 오늘날 우리가 모든 느낌을 쉽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한글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해례본에 나와 있는 것처럼 훈민정음 28자는 바람소리, 학이나 닭의 울음소리, 개 짖는 소리 등 천지자연의 소리를 모두 적을 수 있는 완벽한 표음문자로 창제되었다. 당시 중국어 발음까지도 정확히 적을 수 있는 문자체계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그러나 무려 500년 가까운 긴 세월을 쓰지 않고 묻어 두었던 탓에 한글에 큰 발전은 없었던 듯싶다. 오히려 28자 중 4개(ㆍ, ㅿ, ㆆ, ㆁ)는 사라졌는데, 이들은 과연 어떤 소리였는지 궁금하다.

배우기 쉬운 한글 덕에 문맹은 찾아보기 힘들고 산업과 문화가 크게 융성하는 대한민국이 되었으니 세종대왕께서 오늘의 세상을 보신다면 매우 기뻐하실 것이다. “ㅎㅎ”나 “ㅠㅠ” 같은 표기에도 미소 지으실 것 같다. 그러나 21세기는 국제어를 한글로 정확히 표현하는 일도 중요한 시대다. 그런 측면에서 프랑스(France)와 파리(Paris)처럼 확실히 다른 소리인 F와 P를 모두 ‘ㅍ’으로 표기하는 점은 아쉽게 생각하실 듯싶다. 파이팅이나 팩스 등은 모두 원음에 맞지 않는 한글 표기다. 비전문가로서 ‘ㅍ’ 위에 점을 하나 찍어 F발음으로 나타내면 어떨까 하는 단순한 생각도 들었다. L과 R 그리고 B와 V 등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이런 문제들은 앞으로 한글학자 등이 지혜를 모아 해결하길 기대한다. 세종대왕께서 만들어 주신 소중한 보물을 더욱 빛나게 가꾸는 일은 우리의 책무다.

김도연 객원논설위원·서울대 명예교수



#세종대왕#한글#문맹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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