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놀자!/클릭! 재밌는 역사]조선 후기 농민봉기의 중심에 섰던 홍경래와 전봉준

이환병 서울 고척고 교사 입력 2021-07-14 03:00수정 2021-07-14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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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봉기는 왜 일어났을까
윗쪽 사진은 1811년 홍경래의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관군이 평안북도 정주에서 봉기군과 대치하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 전봉준은 동학농민운동 실패 후 체포돼 재판을 받았다. 사진 속 들것에 실려 있는 사람이 전봉준이다. 사진 출처 서울시립박물관·동아일보DB
우리 역사에서 19세기는 ‘농민 봉기의 시대’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19세기에 홍경래의 봉기, 임술 농민 봉기, 동학 농민 운동이 연속하여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농민 봉기에는 봉기의 지도자가 있으며, 이들을 통해 봉기의 배경이나 목적 등을 분석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홍경래와 전봉준을 통해 농민 봉기의 여러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정감록과 동학이 미친 영향
홍경래의 격문에는 세상을 구제할 진인(정도령)이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났으며, 그 진인이 정예군사 10만을 거느리고 중국에 머물러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홍경래 자신은 “진인이 군사를 이끌고 조선에 쳐들어오기 전에 진인의 뜻을 받들어 먼저 군사를 일으켰다”라고 설명했습니다. 홍경래가 진인 출현설을 주장한 것은 자신을 따르는 봉기군을 결속하고 민심을 장악하는 데 긴요했기 때문입니다.

동학은 1878년경 삼남지방에 널리 퍼지면서 교단 조직이 정비되었습니다. 이는 개항 이후 경제적으로 더욱 어려워진 농민이 동학에 가입했기 때문입니다. 동학의 교세가 확장되는 시기에 교단의 흐름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습니다. 하나는 동학의 힘에 의한 지상천국의 실현, 개인적 구제 등에 치중하는 흐름이고 또 하나는 농민층의 생활 향상, 사회적 불평등의 해소 등에 치중하는 흐름이었습니다. 전봉준은 1890년 무렵 동학에 가입하였고, 1892년에는 고부 접주로 임명됐습니다. 전봉준은 동학 교단의 두 흐름 중 하층 신도와 농민의 요구를 반영한 정치 사회 운동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전봉준은 동학사상 자체보다 교단 조직을 이용해 봉기를 확산시키려 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처지 비슷한 사람들 모아 세력 키워
홍경래와 전봉준은 자신이 살았던 지역사회 속에서 처한 상황이 비슷한 사람을 모아 봉기를 준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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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의 신분은 몰락 양반이라는 설과 평민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홍경래가 양반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외숙인 유학권에게 글을 배운 점, 19세에 평양에서 열린 소과에 응시한 점, 서당 훈장을 한 점 등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당시 평민도 서당에서 글을 배우고 소과에 응시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홍경래가 평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그의 친족 중에 양반을 찾을 수 없다는 점, 그의 부인 이름이 ‘최소사’(평민 부녀자를 일컫는 명칭)라는 사실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홍경래의 경제적 처지가 가난한 농민과 비슷했다는 점입니다. 가난하지만 글을 배운 지식인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서북지방에서 가난한 농민, 불만이 많은 몰락 양반과 유대 관계를 맺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전봉준은 재판기록(전봉준 공초)과 여러 사료가 있어 신분이나 봉기의 이유를 비교적 자세하게 알 수 있습니다. 전봉준은 몰락한 시골 양반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논 세 마지기를 짓는 자작농이었습니다. 논에서 나오는 식량은 식구들이 먹고살기에 많이 부족해 서당을 운영해 생계를 보조했습니다.

○무능한 정부-부정부패가 촉발한 봉기


홍경래의 봉기는 세도정치 시기 조세 행정의 문란, 동학농민운동은 개항 이후 일본 상인의 침투로 인한 농민 생활의 어려움을 배경으로 발생했습니다. 시대적 배경은 다소 달라도 정부의 무능, 관료의 부정부패 등이 봉기의 주요 원인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홍경래의 봉기는 서북지방에서 시작됐습니다. 당시 서북지방은 청과의 무역, 은과 구리 광산의 개발로 상공업이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중앙의 세도 정권은 서북지방의 상공업자들을 수탈의 대상으로 삼아 자신들의 부를 축적했습니다. 또한 서북지방의 양반 역시 과거에 합격해도 관직에 나가지 못해 불만이 쌓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지역적 정서를 바탕으로 홍경래의 봉기는 약 10년 동안 준비됐습니다.

봉기의 주도 세력은 가산의 다복동 마을, 운산 촛대봉 밑에 있는 광산을 거점으로 삼아 세력을 키워 나갔습니다. 부를 축적한 상인의 자본으로 광산 노동자, 가난한 농민, 유랑민을 모아 급료를 지불하고 군사 훈련을 시켰습니다. 홍경래군은 봉기를 일으키면서 각 군현의 수령들에게 어리석게 저항하지 말고 자신들의 군대를 맞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농민과 상공업자의 요구를 반영한 개혁 내용을 제시하지는 못했습니다. 새로운 사회 건설에 대한 구체적 방안을 마련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전봉준은 동학 접주 임명 이후 금구집회와 보은집회에 참여했습니다. 전봉준과 서인주가 주도한 금구집회(1892년 2월)에서는 ‘척왜양(일본과 서양 세력을 몰아내자)’을 내세우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목표를 담은 격문을 전국 각지에 보냈습니다. 보은집회(1893년 3월)에는 1만∼2만 명으로 추산되는 교도들이 전국에서 모여 척왜양,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 중지 등을 요구했습니다. 정부는 그 규모에 놀라 어윤중과 청주의 부대를 파견해 해산을 권고하였고, 당시 동학의 지도부는 관군과의 무력 충돌을 우려해 해산을 결정했습니다.

전봉준은 동학의 집회에 참여하면서 점차 고부 지역을 대표하는 지도자로 부상했고, 곧이어 고부민란을 주도하게 됐습니다. 전봉준은 1894년 1월 1000여 명의 농민들을 이끌고 고부 관청을 습격했습니다. 농민군은 죄수 석방, 악질적인 향리 처벌, 관청 곡식의 농민 분배, 무기고를 열어 무장을 강화한 다음 백산 지역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전라도 각지의 농민들이 백산으로 모여들며 동학농민군 1차 봉기가 시작됐습니다. 전봉준은 봉기의 과정에서 ‘제폭구민(포악한 관리를 몰아내고 백성을 구하자)’, ‘척왜양’, ‘보국안민(나라를 바로잡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자)’ 등을 내세웠습니다. 전봉준이 제시한 개혁은 부정한 관리의 처벌, 부정부패의 일소 등이 핵심이었으며, 점차 일본이 우리나라의 내정을 간섭하고 침략을 본격화하자 일본 세력을 몰아내는 방향으로 전환했습니다.

이환병 서울 고척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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