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어려울 때, ‘궁하면 떠나라’[Monday DBR]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5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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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시작은 어렵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은 시작이 그만큼 어렵다는 사실을 웅변한다. 주역에서는 시작의 어려움을 ‘둔(屯)’으로 나타낸다. 주역 64괘 가운데 시간과 공간의 창조를 상징하는 중천건괘와 중지곤괘에 이어지는 세 번째 괘가 수뢰둔(屯)괘로 주역이 다루는 굽이굽이 인생길의 실질적인 시작점을 의미한다. 여기서 둔(屯)자는 땅속에 있던 씨앗이 발아해서 머리를 삐죽이 내미는 형상으로 시작의 어려움을 상징하는 글자다. 그렇다고 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첫발을 떼기가 힘들지만 강력한 의지와 리더십이 있으면 상황을 돌파할 수 있다.

첫째, 일을 새롭게 만들어가야 하는 시작 단계에서는 모든 것이 매우 불확실하므로 함부로 나서지 말고 신중한 자세로 상황을 예의주시하라는 것이 주역의 가르침이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수뢰둔괘 괘사에서는 ‘이건후(利建侯)’, 즉 ‘제후를 세우는 것이 이롭다’고 조언한다. 제후를 세운다는 것은 확고한 리더십을 갖춘다는 의미다.

휼렛패커드(HP)의 창업자 빌 휼렛과 데이비드 패커드는 실리콘밸리의 창고에서 회사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동전을 던져 누가 CEO(최고경영자)가 될지를 정하는 것이었다. 리더십을 구축하기 위해서였다. 동전 던지기에서 이긴 빌 휼렛이 CEO를 맡고, 거기서 진 데이비드 패커드는 COO(최고운영책임자)를 맡는 것으로 교통정리가 돼 리더십 문제를 해결했다. 그래서 회사 이름도 휼렛패커드가 됐다.

주역에서 말하는 두 번째 난관은 의사결정의 문제다. 수뢰둔괘 육이(六二) 효사에서는 의사결정을 앞둔 상황에서의 내적 갈등을 ‘둔여전여(屯如^如) 승마반여(乘馬班如) 비구혼구(匪寇婚구)’라고 표현한다. ‘꽉 막혀 있어 머뭇거린다. 말 위에 올라탔다 내렸다 한다. 도적이 아니라 청혼하러 온 것이다’는 뜻이다. 주역에서는 이럴 때일수록 긴 호흡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구글이 검색 엔진을 시장에 내놨을 때 실리콘밸리의 평론가들은 ‘아이들 장난’으로 치부했다. 하지만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개의치 않고 긴 호흡으로 승부하는 전략을 택했다. 단기적으로 성과를 내지는 못했지만 멀리 내다보면서 꾸준하게 플랫폼의 단점을 보완하고 개선하는 데 집중했다. 그 결과 몇 년 후 그들은 검색 시장의 최강자 야후를 제치고 실리콘밸리의 정상에 등극했다.

세 번째로 수뢰둔괘 육삼(六三) 효사에서는 시작의 또 다른 애로사항으로 전문가의 도움을 받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록무우(卽鹿无虞) 유입우림중(惟入于林中)’는 ‘사슴을 쫓는데 우인의 도움을 받을 수 없어 깊은 산중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우인(虞人)은 왕이 사냥을 할 때 곁에서 이를 돕는 전문직 관료다. 사슴을 쫓을 때 우인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초창기의 기업이 설립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주변의 도움을 구하기 힘든 상황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제시된 주역의 방책은 동맹이다. 수뢰둔괘의 원문을 빌리면 ‘구혼구(求婚購)’다. 결혼으로 화친을 도모한다는 뜻인데 기업으로 말하면 파트너십의 구축이다. 애플은 초기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인텔 출신 마이크 마쿨라를 영입했다. 인텔에서 받은 스톡옵션 덕분에 자산가 반열에 오른 마쿨라가 상당한 정도의 운영 자금을 투자하는 대신, 그에게 공동창업자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의 지분과 동등한 지분을 떼어 줬다. 창업 초기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 경영권의 3분의 1을 동맹 세력에게 할애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수뢰둔괘에 제시된 타개책들이 시작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만능키는 아니다. 시작의 어려움 때문에 앞길이 보이지 않을 때는 일상을 잠시 접어두고 여행을 떠나보는 것도 좋은 방책이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대학을 중퇴한 후 처음으로 취직한 회사에서 동료들과 마찰을 빚자 사직서를 던지고 인도 순례길에 나섰다. 잡스는 단순하고 간결한 삶을 모토로 하는 인도인들에게서 단순함이 가진 위대한 힘을 발견했고, 그 단순함을 애플의 디자인에 입혔다. ‘궁하면 떠나라’는 주역의 가르침이 큰 기업을 일구는 원동력이 된 셈이다.

이 글은 DBR(동아비즈니스리뷰) 321호에 실린 ‘시작이 어려울수록 멀리 보는 지혜를’을 요약한 것입니다.

박영규 인문학자 chamnet21@hanmail.net
#시작#첫발#의지#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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