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살기 위해 목숨 건다… 맨몸으로 고래와 싸우는 사람들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5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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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고래잡이/더그 복 클락 지음·양병찬 옮김/488쪽·1만9000원·소소의책

고래잡이에 나선 작살꾼들이 고래 등에 작살을 꽂기 위해 힘껏 뛰어올라 몸을 던지고 있다. 약 300명에 이르는 라말레라 부족의 고래잡이꾼들은 1년에 평균 20마리의 향유고래를 잡아 1500여명의 부족원을 먹여 살린다. 사냥 현장에서 선장이 큰소리로 가장 많이 외치는 말은 “가족을 먹여 살리고 싶으면 노를 빨리 저어라!”다. 소소의책 제공
고래잡이에 나선 작살꾼들이 고래 등에 작살을 꽂기 위해 힘껏 뛰어올라 몸을 던지고 있다. 약 300명에 이르는 라말레라 부족의 고래잡이꾼들은 1년에 평균 20마리의 향유고래를 잡아 1500여명의 부족원을 먹여 살린다. 사냥 현장에서 선장이 큰소리로 가장 많이 외치는 말은 “가족을 먹여 살리고 싶으면 노를 빨리 저어라!”다. 소소의책 제공

헤어질 때 ‘잘 가요’ 대신 ‘돌아와요’라고 인사하는 부족이 있다. 떠나는 이에게 꼭 돌아오라고 인사하는 건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수두룩해서다. 이 책은 빨리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도 돌아오지 않은 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인도네시아 렘바타섬에 거주하는 ‘라말레라’ 부족은 1500명가량으로, 현존하는 수렵채집 집단 중 가장 작은 규모에 속한다. 이들은 고래사냥에 의존해 생계를 잇는 탓에 생태계 보호주의자들의 비판 대상이 되곤 한다. 땅이 메말라 농작물을 재배할 수 없는 외딴 섬에 사는 이들은 목숨을 걸고 앞바다로 나가 떼 지어 다니는 향유고래를 사냥한다.

저자는 2011년 이곳을 처음 방문한 뒤 2014∼17년 여섯 번에 걸쳐 라말레라 부족을 밀착 취재했다. 그는 이들과 함께 사냥에 수십 차례 참여했고, 민가에서 숙식을 같이 했다. 그래선지 책에 수차례 등장하는 고래사냥 장면은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숨 막히게 생생하다. 저자는 고래잡이의 결정적 순간에 힘껏 뛰어올라 작살을 아래로 내리꽂아야 하는지, 체중을 실어 옆에서 밀어 넣어야 하는지 판단할 수 있을 정도로 이들을 면밀히 관찰했다.

책은 이들의 미시생활사를 세세히 기록하며 건조하게 흘러간다. 하지만 산업사회가 잊어버린 자연을 향한 경외나 특정한 가치에 대한 극진한 믿음 같은 것들을 목도할 때 독자들은 숭고한 감정에 사로잡히리라. 작살 하나를 손에 들고 바다에 훌쩍 뛰어드는 주민의 맨발이 찍힌 사진이 그러했다. 한 인간이 자기 몸무게의 1000배에 이르는 고래를 향해 몸을 던지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지만, 사진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건 그의 연약한 맨살이다. 그가 고래잡이에 무엇을 걸었는지 알 것도 같다.

책을 읽는 내내 몇 년 전 배가 부풀 대로 부풀어 오른 채 육지로 떠밀려온 고래 사체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고래는 부패로 발생한 가스를 이기지 못하고 며칠 뒤 굉음을 내며 터져버렸다. 이때 배 속에 담긴 온갖 쓰레기들이 새빨간 피와 함께 사방으로 튀었다. 인간 대 자연의 대립구도는 이런 장면에 적용될 수 있는 게 아닐지. 책장이 넘어갈수록 라말레라 부족은 자연의 편에 훨씬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근 다른 부족들이 도시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고 있지만 이들은 고래잡이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기술을 앞세워 전통을 버리게 하려는 외부의 요구는 인간의 폭력성과 닮아 있다. 저자는 “전통문화는 특정 환경에서 최선의 생존방법을 결정하기 위해 수세기 동안 자연실험을 해온 결과물이며, 그 과정에서 서양의 과학이 짐작조차 못 하는 지식이 축적됐다”고 말한다. 외딴 렘바타섬에서 자연을 정작 훼손하고 있는 이들이 누군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고래#책의 향기#고래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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