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존엄을 지킨다는 것[움직이는 미술]

송화선 신동아 기자 입력 2021-05-07 03:00수정 2021-05-28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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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어터몰렌의 자화상. 왼쪽부터 1996년, 1999년, 2000년 작품. 사진 출처 Chris Boïcos Fine Arts
송화선 신동아 기자
모든 인간은 늙는다. 올해 아카데미영화제는 그 보편적 경험의 무게와 고통을 생생하게 표현한 배우들에 주목했다. 윤여정이 영화 ‘미나리’에서 선보인 할머니 연기로 만 73세에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남우주연상은 윤여정보다 열 살 더 많은 배우 앤서니 홉킨스에게 돌아갔다.

1937년 태어난 홉킨스는 플로리안 젤러 감독 영화 ‘더 파더’에서 알츠하이머에 걸린 노인 ‘앤서니’를 연기했다. 극중 앤서니는 이름뿐 아니라 생일까지 홉킨스와 같다. 감독이 그를 캐스팅하기로 마음먹고 시나리오를 썼기 때문이다.

극중 앤서니는 영국 런던 고급 주택가에서 홀로 노년을 보낸다. 수많은 책과 그림으로 둘러싸인 거실, 부엌일을 할 때조차 오페라 아리아를 틀어 놓는 그의 취향은 이 남자가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을지 충분히 짐작하게 만든다. 그는 분명 자신의 교양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고, 남은 삶 또한 지금까지처럼 품위 있게 마무리할 수 있으리라 믿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딸이 자꾸만 간병인을 집에 들이라고 하는 것부터 수상쩍다. “저 아이가 내 재산을 빼앗으려고 수를 쓰는 게 아닐까.” 의심이 시작되자 세상은 빠른 속도로 뒤틀리기 시작한다. 아끼는 물건이 자꾸 사라지고, 어느 날 갑자기 집 거실에 들어앉은 낯선 남자는 자기가 딸의 남편이라고 주장한다. 그때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나를 ‘아빠’라고 부르는 저 중년 여인은 대체 누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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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앤서니의 시각에서 그가 느끼는 혼란을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한다. 집안 인테리어가 장면마다 미세하게 변하고, 분명 앤서니의 딸인 줄 알았던 배우는 돌연 그의 간호사로 스크린에 재등장한다. 앤서니가 아침에 눈을 떠 잠옷 차림으로 주방에 나가보니, 딸은 어느새 저녁상을 차리고 있다. 식탁에서 가족이 주고받는 대화는, 이미 앤서니가 다 들어 빠짐없이 기억하는 내용이다. 시간이 뒤엉키고, 공간이 흩어지며, 세상에서 가장 친밀한 딸의 존재조차 믿을 수 없게 되는 경험. 홉킨스는 공포와 분노, 체념과 수치심이 뒤섞인 복잡한 표정으로 알츠하이머가 무엇인지 보는 이가 뼈저리게 느끼도록 만든다.

영화를 보는 사이, 앤서니의 참담한 얼굴 위로 윌리엄 어터몰렌(1933~2007)의 자화상이 스쳐 지나갔다. 화가 어터몰렌은 1995년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 이후 꾸준히 자화상을 그렸다. 미술사 교수인 어터몰렌의 아내 패트리샤는 뉴욕타임스와 한 인터뷰에서 “남편은 자기 자신을 그림으로써 병을 이해하려고 시도했다”고 말했다.

그 과정에서 탄생한 어터몰렌의 자화상 연작은 알츠하이머가 사람 뇌를 어떻게 잠식해 가는지 보여주는 일종의 교과서다. 1996년까지만 해도 뚜렷하게 남아 있던 화가의 개성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흐릿해진다. 그림에서 색채가 사라지고 스케치 선조차 뭉개지다 결국 캔버스에 낙서만 남게 된 시기는 2001년. 이후 어터몰렌이 더는 종이 위에 연필로 선을 그을 수 없게 되면서 그의 작업은 막을 내렸다. 하지만 이 작품들은 미술뿐 아니라 의학, 심리학 분야에서도 가치 있는 연구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존엄을 지키고 싶은 바람은 어쩌면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일지 모른다.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나로서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것,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자 애쓰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를 만 83세에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받은 홉킨스와 어터몰렌의 삶이 웅변하는 듯하다.

송화선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
#생#존엄#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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