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할머니[이정향의 오후 3시]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4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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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집으로

이정향 영화감독
이정향 영화감독
일곱 살 상우는 철없는 도시의 꼬마입니다. 상우의 엄마는 오랫동안 연락을 끊었던 고향 집을 찾아와 말 못 하는 외할머니에게 상우를 맡깁니다. 상우에게는 할머니를 비롯해 모든 게 못마땅한 산골 생활이지만, 말없는 할머니의 사랑에 녹아들어 계절이 끝날 무렵 상우의 마음은 훌쩍 자라납니다. 서투른 작별 인사 후 상우는 엄마의 집으로, 할머니는 빈집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이 둘이 향한 곳은 둘이 가꾼 마음의 집이겠지요.

칼럼을 맡을 때 제 영화를 소개하는 몰염치한 일은 없을 거라고 자신했기에, 양해를 구합니다. 주인공 김을분 할머니께서 지난 토요일에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발인 때도 제대로 작별 인사를 못 드렸습니다. 너무 많은 말이 솟구쳐서요. 코끝을 스친 새벽바람만 기억납니다.

많은 분들이 왜 할머니가 말을 못 하는 설정이냐고, 연기력의 부족함을 때우려는 술수였냐고 묻습니다만, 할머니는 대사가 많아도 잘 소화하셨을 겁니다. 제가 시나리오를 쓸 때 잡은 주제가 ‘할머니는 자연이다’였고, 자연이 말이 없듯 할머니도 말이 없으면 그 사랑이 더 커 보일 것 같았거든요.

할머니와 처음으로 한 식사는 20년 전, 할머니 댁에서였습니다. 벽장에서 사발면을 꺼내 주셨습니다. 집밥이 그리웠던 저희는 실망을 하며 사발면에 물을 부었습니다. 그때 할머니가 당신 몫을 저희 쪽으로 슬며시 밀며 속이 안 좋아서 밥을 드시겠다더군요. 배신감을 느꼈지만 곧 눈치챘습니다. 산골 오지에 사는 할머니에겐 사발면이 특식 중의 특식이란 걸. 신작로에서 두 시간을 걸어 올라와야 하는 집이라 이 사발면들을 굽은 허리로 지고 오르셔야 했단 걸요. 이럴 때는 무조건 화를 내야 합니다. “할머니! 진작 말씀하시지, 우리도 하나 이상은 못 먹어요. 물까지 부어버렸으니 뒀다 먹을 수도 없고, 버려야겠네. 에잇!” 할머니는 그제야 마지못해 사발면을 드십니다. 우리에게 덜어줄 기회를 계속 살피시면서. 마지막 식사는 2년 반 전의 고깃집에서였습니다. 그때도 할머니의 머릿속은 당신 앞의 고기 한 점조차 저희 입에 넣어줄 생각으로 바빴습니다.

마음 둘 곳을 모르겠습니다. 한동안은 할머니라는 글자만 봐도 눈물이 나겠지요. 태어날 때부터 제 옆에 외할머니가 계셨고, 외할머니를 여의자마자 김을분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할머니 없이 산 적 없는 제가 이제는 누군가에게 넉넉한 품을 내어주는 할머니가 되어야 할 나이임을 깨닫습니다. 할머니의 가족은 제가 할머니를 행복하게 해드렸다고 하지만, 할머니 덕분에 제가 더 행복했습니다. 할머니, 이 지구에 와주셔서, 우리들의 할머니가 되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할머니를 만난 건 제 인생 최고의 행운입니다.

이정향 영화감독


#할머니#집으로#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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