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의열단 김상옥 숨겨줬다 ‘무한한 고초 겪은’ 그녀

이진기자 입력 2021-01-12 11:40수정 2021-01-22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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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12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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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12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 들것이 들어왔습니다. 들것에는 한 처녀가 실려 있었죠. 그녀는 판사가 묻는 말에 신음에 가까운 소리만 낼 뿐이었습니다. 머리맡에 여동생이 쪼그려 앉아 언니의 대답을 듣고 전달해야 했죠. 동아일보 1923년 12월 26일자 2면 기사입니다. 그녀는 5월 12일 법정에 처음 나왔지만 재판을 받을 상태가 아니었죠. 6월 30일 다시 불려나왔으나 병세가 여전해 재판이 중단됐죠. 6개월이 지났어도 차도는 없었습니다.

그녀는 28세 이혜수. 이혜수가 이 지경이 된 이유는 그해 1월 12일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의열단 김상옥을 숨겨줬기 때문입니다. ‘숨 멎어서도 방아쇠는…항일시가전 호외’(2020년 11월 21일자)에 소개한 대로 김상옥은 매부 고봉근의 후암동 집에 숨어 있었죠. 세입자의 밀고로 일제 경찰이 들이닥치자 그는 체포조인 유도사범 다무라를 사살하고 우메다, 이마세 두 경부에게 총상을 입힌 뒤 탈출했습니다. 김상옥은 맨발로 눈 덮인 남산을 넘어 효제동의 이혜수 집으로 간신히 숨어들었죠. 1월 18일의 일이었습니다.

이혜수는 김마리아의 애국부인회에 참여했고 일제가 저지른 제암리학살사건에 분노해 김상옥이 결성한 혁신단에도 함께 했죠. 이혜수는 발에 동상이 걸린 김상옥을 위해 방이 후끈하도록 불을 잘 때주었습니다. 그 바람에 동상이 악화되긴 했지만요. 이혜수의 부친은 활을 잘 쏘던 63세 한량이었고 모친 고성녀는 61세였습니다. 이혜수가 맏딸, 밑으로 여동생만 4명인 ‘딸 부잣집’이었죠. 둘째와 셋째는 공립보통학교 교사, 넷째는 한성은행에 다녔습니다. 열한 살 막내는 귀여움을 독차지했겠죠. 하지만 이 집의 평화는 곧 산산조각 났습니다.


1월 22일 새벽 일제 경찰 수백 명이 효제동 73번지 이혜수 집을 에워쌌죠. 경찰은 1월 17일 다무라가 제 힘만 믿고 무작정 들어갔다가 총에 맞아 죽었기 때문에 이혜수 가족더러 김상옥이 숨어있는 방문을 열라고 했죠. 가족이 벌벌 떨기만 하자 경찰은 “너희 집 식구를 전부 몰살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폭탄으로 폭파시키겠다”고 협박했습니다. 할 수 없이 막내딸이 방문을 여는 순간 김상옥의 권총이 불을 뿜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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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알이 막내딸을 지나쳐 구리다 경부를 맞힌 순간 김상옥은 다락의 벽을 손으로 뜯어내고 옆집으로 피신했습니다. 효제동 73번지에서 74번지로, 다시 76번지로 벽을 뚫고 들어간 뒤 이 집 변소에 있다가 72번지로 넘어갔죠. 김상옥은 집주인에게 이불을 달라고 했습니다. 이불로 경찰의 총알을 막으며 싸우려던 것이죠. 하지만 중과부적, 결국 그는 자결했습니다.


일제 경찰은 김상옥의 뒤를 캐려고 이혜수의 아버지 어머니는 물론 여동생 둘까지 끌고 가 심하게 고문했죠. 이혜수 등 딸 3명은 자신들이 당하는 고문과 수치심도 못 견딜 일이었지만 환갑이 넘은 아버지 어머니가 매달린 채 매를 맞으며 울부짖을 때 더 마음이 아팠다고 합니다. 이혜수 본인도 무지막지한 고문 끝에 늑막염 등으로 몸을 가누지 못했죠. 동아일보 4월 1일자 기사의 ‘무한한 고초를 겪어’라는 짧은 구절 속에 숨어있는 실상이었습니다. 법원은 ‘혁명부인’이라는 검사의 논고에 따라 징역 1년형을 때렸죠. 동아일보 창간기자 유광렬은 고문과 복역으로 그녀가 청춘과 결혼을 희생했다고 훗날 전했습니다.

변론을 맡았던 김병로는 해방 뒤 대법원장 시절 한 여자가 면회를 와 만나보니 백발이 된 이혜수였더랍니다. 출옥 후 몇 년이 지나 몸은 회복됐지만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했다죠. 정부에 서민주택을 신청할 때 필요한 증명서를 써달라고 해서 김상옥 의사와 관련된 사실을 써줬다고 했습니다. 해방 뒤에도 가난에 허덕여 살 곳도 없는 사실을 알게 된 김병로가 느낀 인생의 허무함과 사회의 냉정함은 그만의 감상은 아닐 듯합니다.

이진기자 lee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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