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지에선 경험할 수 없는 일[김인현의 바다와 배, 그리고 별]〈43〉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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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선장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선장
당직이 새벽 4시 종료되었다. 잠을 청하려고 하는데 요란한 벨소리가 울렸다. 1등기관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온 배를 다 뒤져도 그는 없었다. 배 위 뒤편에서 그의 슬리퍼 한 짝이 발견되었다. 3일간 컬럼비아강 입구에서 수색작업을 벌였지만 성과는 없었다.

미국 북서부 워싱턴주 컬럼비아강 하구에 롱뷰라는 항구가 있다. 부두에 배가 붙자 일단의 한국 여성 5명이 선박에 올라왔다. 동포들이 그리워서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사는 곳도 타코마, 시애틀, 포틀랜드 등 다양했다. 우리 선원들도 동포들을 이국에서 만나자 반가워서인지 금방 친해졌다. 우리 배는 다시 롱뷰에 기항했다. 다시 그녀들이 올라왔다. 맛있는 반찬도 가져왔다. 이렇게 여러 차례 반복했다. 선원들과 그녀들은 친구처럼 되었다. 다음 항차는 미국 동부로 가라는 항해 지시를 선장이 받은 상태였다. 이제는 다시 보기 어려울 것이라면서 아쉬워 손 흔드는 그들을 보면서 배는 출항했다.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남자들과 여자들은 그렇게 헤어졌다. 그날 밤 실종사건이 발생한 것이었다.

사고 뒤 항차가 변경되어 우리 배는 다시 롱뷰에 들어갔다. 다시 만난 그들은 1등기관사의 실종을 안타까워했다. 3년 뒤 나는 다른 배를 타고 미국에 입항했다. 실종된 그가 미국 어느 항구에서 한국 여성과 가게를 차렸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와 통화가 됐다. 반가웠다. 죽은 줄 알았던 동료가 살아있다니. 그날 밤 컬럼비아강을 따라 항해할 때 그는 배 뒷전에서 뛰어내려 헤엄쳐 육지로 갔다. 그리고 애인이 된 그녀의 집에서 얼마간 숨어 지냈다는 것이다. 그 시절 선원들은 육지가 그리워 가끔 이런 비난받을 짓을 하곤 했다.

반대되는 일도 있다. 선박이 돼지를 화물로 운송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출항 시 탈주자가 선박에 숨어 화물과 함께 외국으로 밀항하는 경우가 있다. 그 탈주자를 속어로 ‘돼지’라고 부른다. 출항 시 선박을 샅샅이 뒤져 돼지가 있는지 확인하고 확인 결과를 로그북에 기록해야 한다. 위의 실종사건은 선원이 한 사람 없어지는 일이지만, 돼지사건은 사람이 늘어나는 것이다. 나는 운이 좋아서인지 돼지사건을 한 번도 경험하지 않았다.

새로운 배에 올라갔더니 교대할 선장이 휴가를 안 간 지 5년이 되어간다는 것이었다. 송출선이라고 해도 계약상 10개월이면 휴가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2개월 정도 휴가를 보낸 다음 다른 배에 타게 된다. 그런데, 이 선장은 항구에서 바로 다른 배에 승선한다는 것이다. 충돌사고가 나서 책임을 질 일이 있어 귀국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때는 의아했다. 법대에서 형사소송법 공부를 하면서 짐작하게 됐다. 그 선장은 공소시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육지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이런 일들이 바다에선 왕왕 일어났다. 이런 이야기들이 선원들의 입을 통해 이 배 저 배로 전달되었다. 그 사연에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웃기도 하면서 선원들은 육지로 돌아가는 휴가를 기다렸다.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선장
#바다#육지#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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