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글릭 작품 셀프로 번역합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0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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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번역서 0권인 탓에 독자들 알아서 번역 공유
“출판사도 하지 않은 일 덕분에 잘 읽었다” 호응

‘오래전에 나는 상처 입었다. 내가 산 것은 나의 복수를 위해서…(Long ago, l was wounded. I lived to revenge myself…).’

9일 트위터에는 올해 노벨 문학상을 받은 미국 시인 루이즈 글릭(77·그림)의 대표 시(詩) ‘첫 기억(First Memory)’의 한국어 번역본이 올라왔다. 이 시를 번역한 사람은 전문 번역가가 아니지만 번역된 시는 50차례 이상 공유되며 트위터에 퍼졌다.

글릭의 노벨 문학상 수상이 공식 발표된 8일 이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중심으로 개인들이 번역한 글릭의 시가 여기저기 올라오고 있다. 글릭은 12권의 시집과 여러 수필집을 냈지만 한국에서는 그의 시 ‘눈풀꽃’ ‘애도’ 등만이 시선집(詩選集) 두 종에 포함돼 번역돼 있을 뿐이다. 번역과 출간에 한 달 이상 걸리는 상황을 기다리지 못한 한국 독자들이 스스로 그의 시를 번역해 공유하면서 함께 감상하고 있는 것이다.

한 온라인 문학 커뮤니티에는 ‘고난의 끝자락에/출구가 있었다(At the end of my suffering/there was a door)’로 시작하는 그의 시 ‘야생 붓꽃(The Wild Iris)’ 번역본이 올라왔다. 이 시를 번역한 글쓴이는 “저의 주관적인 해석이다. 원문을 각자 자기 방식으로 받아들이면 좋겠다”고 했다. 이 커뮤니티를 찾은 사람들은 “덕분에 잘 읽었다” “어느 출판사도 하지 않는 노력”이라며 적극 호응했다.

한 블로거는 ‘시월(October)’을 번역해 자신의 블로그에 공개했다. 이 블로거는 “(시에서) 마침표 없이 이어지는 질문은 알 수 없는 상황에 처한 화자의 황망한 심리 상태를 잘 나타낸다”며 “우리는 화자가 무슨 일을 당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고 해석까지 적극적으로 풀어냈다. SNS에서는 번역본뿐만 아니라 글릭의 시 원전을 공유하며 감상을 나누고 있다.

영문학계에서는 일반 독자들이 글릭의 시 번역에 나설 수 있는 데는 간결한 문체의 덕도 작지 않다고 보고 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를 정도의 영어 실력만 있으면 전문적인 해석이 없어도 이해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한국 독자에게 생소한 제3세계 문학이 아니라 영문학이라는 점에서 번역본과 원문을 대조해 읽기 쉽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 문학이 출판사가 아닌 독자 주도적으로 소비되는 흐름의 지표로서 의미가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노벨상#글릭#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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