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형태만 있으면 돼”[이정향의 오후 3시]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9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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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신문기자

이정향 영화감독
이정향 영화감독
2017년 일본 도쿄 신문사의 여기자 모치즈키 이소코는 신설되는 의학대학의 인허가 과정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한다. 학교 부지로 국유지를 시세의 15% 가격으로 매입했고, 이사장은 총리의 친구다. 하지만 정부는 총리의 특혜 의혹을 부정하고, 총리가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증거를 삭제한다. 내부고발자가 나타나지만 폭로 후 오히려 성매매 의혹으로 곤욕을 치른다. 책임을 떠안았던 재무성 직원이 자살하자 정부는 그에게 공금을 유용했다는 죄목을 씌운다. 진실에 다가갈수록 비리의 덩어리가 커진다.

배우 심은경이 실존 인물 모치즈키 기자 역을 맡았다. 오보를 썼다는 누명으로 자살한 기자였던 아버지, 그에 대한 동경과 아픔을 간직한 탓에 세상을 믿지 못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인간 한 명, 한 명의 삶에 진심으로 관심을 갖고 정의를 향해 질주하는 인물이다. 또 한 명의 주인공은 엘리트 공무원 스기하라. 국가에 헌신하는 꿈을 가진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가짜 뉴스를 퍼뜨리고 댓글부대를 동원하는 것. 정부의 비리를 폭로한 관료를 불륜 의혹으로 매장시키고, 성폭행을 저지른 총리의 친구는 정치적 희생양으로 둔갑시키면서 피해자 여성을 꽃뱀으로 모는 일들에 가책을 느낀 스기하라에게 그의 상관은 매스컴의 보도에 대응하는 조치일 뿐이며 국가를 지키는 중요한 업무라고 격려한다. 하지만 존경하던 선배가 신설되는 의학대학의 비리를 알리려다 죽음을 맞자 스기하라는 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고자 내부 비밀문서를 유출한다. 그 덕에 모치즈키 기자가 정권의 비리를 폭로하지만 정부는 가짜 뉴스로 매도한다.

시종일관 어둡고 느리게 흘러가는 영화는 분노를 표출하기는커녕 꾹꾹 눌러 담는다. 무겁다 못해 가라앉는 기분은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으리라는 예감일까? 진짜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관련자들은 불구속되었고, 국회에서 총리에게 유리한 증언을 한 재무성 간부들은 모두 승진했다. 영화의 마지막 대사는 스기하라의 “미안”이다. 공무원으로서 국민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미안, 이런 나라를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들린다.

영화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건 “정권 유지가 곧 이 나라의 평화와 안정이다. 민주주의는 형태만 있으면 된다”며 국민들의 권력은 아랑곳 않고 자신들의 권력 유지에만 신경 쓰는 관료들이다. 정권은 바뀌지 않았지만, 권력을 쥔 자들은 여전히 반성하지 않지만, 모치즈키나 스기하라 같은 용감한 이들의 헌신으로 국민들이 깨치고 변화한다. 국민들이 바뀌면 정치인도 바뀐다. 정권도 바뀐다. 비단 일본만이 아니다. 그 나라의 정치는 국민들의 수준과 비례한다. 비판하지 않는 언론은 반성하지 않는 정부를 만든다.
 
이정향 영화감독
#영화 신문기자#심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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