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악덕신문” 험담 모함하며 ‘동아일보’ 불매운동, 누가?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9월 1일 1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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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3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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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겨울이 물러가지 않은 1922년 2월 10일 새벽 경성 곳곳에 삐라, 즉 전단이 살포됐습니다. ‘악덕신문을 매장하라’는 제목이었죠. 전단이 지목한 ‘악덕신문’은 동아일보였습니다. 동아일보를 ‘혹세무민하는 악마’ ‘몇몇 개인의 명리와 사욕을 꾀하는 사기수단’ ‘군중에 아첨하고 인심을 갈수록 어지럽히는 놈’이라고 험담을 퍼부었죠. ‘자각한 동포는 반드시 비매운동을 단행하라’고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비매운동은 불매운동이죠. 전단 끄트머리에 ‘의분단(義憤團)’이라고 단체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단 내용이 이튿날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3면에 고스란히 실렸습니다. 그것도 상자기사로 눈에 띄게 편집했죠. 매일신보는 전단이 수십만 장이나 살포된 듯하다고 알리기도 했습니다. 같은 기관지인 일본글 신문 경성일보도 전단을 번역해 실었죠. 하루 뒤에는 매일신보나 경성일보 지국이 있는 주요 도시에도 전단이 날렸습니다. 당장 동아일보에 비상이 걸렸죠. 의분단이 어떤 단체이기에 이런 비열한 전단을 뿌렸는지 진상조사에 착수했습니다. 여러 정황을 보건대 매일신보에서 인쇄한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1922년 2월 11일자 매일신보 3면에 실린 ‘악덕신문을 매장하라‘ 전단 내용. ‘우리는 자칭 2000만 여론의 표현기관이란 미명 아래 혹세무민하는 악마 동아일보의 존재를 부인하노라‘로 시작한다. 매일신보 기사에 따르면 수십만 장이나 되는 듯한 전단이 경성에 살포됐다.
1922년 2월 11일자 매일신보 3면에 실린 ‘악덕신문을 매장하라‘ 전단 내용. ‘우리는 자칭 2000만 여론의 표현기관이란 미명 아래 혹세무민하는 악마 동아일보의 존재를 부인하노라‘로 시작한다. 매일신보 기사에 따르면 수십만 장이나 되는 듯한 전단이 경성에 살포됐다.
하지만 범인을 단정할 수는 없는 노릇. 경찰에 범인을 색출해 달라고 요청했죠. 경찰은 ‘설마 매일신보가 바카(ばか‧바보) 짓을 했겠느냐’고 의심했습니다. 당연한 일이겠죠. 경찰 조사가 진행된 며칠 후 매일신보 지배인이 동아일보사를 찾아와 ‘젊은 직원들이 저지른 일’이라며 유감을 표명했죠. 문제는 해명이 계속 바뀌었다는 점입니다. 어느 경상도 사람이 돈을 내고 찍어 달랬다고 말을 바꾼 것이죠. 동아일보가 계속 따지자 사실대로 밝히면 매일신보 체면이 땅에 떨어진다고 일본인 사장이 말해 둘러댔다고 했습니다. 결국 일본인 사장이 경찰에 출두해 광고부 직원과 서무부장 공장장 등 일본인들이 주도한 일이라고 자백했죠.

매일신보의 ‘전단 음해 공작’은 운양 김윤식 사회장 반대 보도에 이어 나온 작태였습니다. 동아일보가 김윤식 사회장을 앞장서 공론화했고 이에 사회주의 진영이 반대하고 나서자 매일신보는 반대 목소리를 지상 중계하듯이 전했죠. 조선노동공제회와 서울청년회 등 반대 진영은 사회장은 핑계였고 민족주의 진영을 공격하려고 동아일보를 표적으로 삼았던 겁니다. 이들의 결의문에 △동아일보 사장은 즉시 사직할 것 △동아일보는 ‘2000만 민중의 표현기관’임을 취소할 것이 포함된 것을 보면 알 수 있죠. 사회주의 진영은 강연회까지 열어 ‘귀족계급과 자본계급에 아부해 우리 2천만 민중의 표현기관이라고 사칭’한다고 동아일보를 비난했습니다.

1922년 2월 1일 경성부 장곡천정 경성상공회의소 공회당에서 열린 김윤식 사회장 반대 2차 강연회 모습. 경성부 장곡천정은 지금의 서울 소공로를 가리킨다. 강연에 나선 박광희(조선노동공제회) 신일용(신인동맹회) 등 사회주의 성향 인사들은 동아일보를 귀족계급 자본계급의 노예라고 비난을 퍼부으며 청중에게 불매운동을 촉구했다. 출처=매일신보
1922년 2월 1일 경성부 장곡천정 경성상공회의소 공회당에서 열린 김윤식 사회장 반대 2차 강연회 모습. 경성부 장곡천정은 지금의 서울 소공로를 가리킨다. 강연에 나선 박광희(조선노동공제회) 신일용(신인동맹회) 등 사회주의 성향 인사들은 동아일보를 귀족계급 자본계급의 노예라고 비난을 퍼부으며 청중에게 불매운동을 촉구했다. 출처=매일신보
매일신보는 동아일보 창간 전까지만 해도 한글 신문의 '지존'이었습니다. 총독부 정책을 두둔해도 비판하는 사람이 없었죠. 동아일보가 태어나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자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특히 만국기자대회와 워싱턴군축회의를 단독으로 취재해 보도한 동아일보의 상승세는 가팔랐죠. 1920년대 초반 매일신보 발행부수는 2만 부 선이었지만 동아일보는 창간 때 1만 부에서 출발해 1924년에 2만 부로 올라섰고 곧 매일신보를 추월했습니다. 총독부로부터 갖가지 지원을 받는 매일신보로서는 다급해진 판에 삐라까지 만들어 뿌렸던 것이죠.

동아일보는 총독부 검열을 받아 1920년대 중반 일주일에 한 번꼴로 압수를 당했습니다. 1926년 한 해만 압수로 빼앗긴 신문이 34만 부가 넘었죠. 동아일보가 이런 탄압 속에서도 꿋꿋이 버티자 매일신보까지 비열한 전단을 뿌려 비방하고 나섰습니다. 동아일보는 사태가 일단락된 1922년 3월 1일자 3면에 그동안의 경위를 자세하게 소개했습니다. 일단 경찰의 조치를 지켜보되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기면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는 경고도 잊지 않았죠.

이진기자 leej@donga.com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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