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 믹스’로 임대주택 갈등 조율하는 프랑스

김윤종 파리 특파원 입력 2020-08-20 03:00수정 2020-08-20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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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현장을 가다]
부촌에도 공공임대주택 건립
엄격한 할당제 시행해도 일부는 벌금 내고 무시
사회적 공존 계속 추진
18일 프랑스 파리의 대표적 부촌인 16구에 위치한 공공임대주택(위 사진). 세계적 건축가 뤼디 리치오티가 전면에 유리를 사용한 현대적 스타일로 디자인했다. 반면 파리 근교 장티이시의 공공임대주택은 건물 노후화가 심해 지역 전체의 슬럼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파리=김윤종 특파원 zozo@donga.com
김윤종 파리 특파원
18일 오후 프랑스 파리의 대표적 부촌(富村)인 16구의 쉬셰(Suchet) 대로를 찾았다. 외벽 전체가 유리로 된 현대적인 10층 건물이 보였다. 얼핏 봐서는 회사 사옥 같기도 했고 어떤 용도인지 쉽게 알 수 없었다.

두리번거리는 기자에게 주민 릭도 씨가 다가와 ‘공공임대주택’이라고 알려줬다. 그는 “주민이 아니면 이 건물이 저소득층을 위한 임대주택임을 쉽게 알기 어려울 것”이라며 “집 안에서 지역 명소인 ‘오퇴유 경마장’이 훤히 보인다”고 설명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건물의 디자인을 유명 건축가 뤼디 리치오티(68)가 담당했다는 점이다. 그는 마르세유의 유럽지중해문명박물관, 니스 인근 망통의 장콕토 미술관 등을 설계한 건축 거장이다. 서울의 보행자 전용 다리 ‘선유교’를 디자인해 한국에서도 유명하다. 세계적인 예술가가 임대주택을 짓는 데 참여했다는 점이 이례적으로 느껴졌다.

○ 6명 중 1명이 공공임대 거주…200만 명 대기

프랑스 공공임대주택은 ‘HLM(Habitation ‘a Loyer Mod´er´e)’로 불린다. 임대료가 저렴한 집이란 뜻이다. 2018년 기준 프랑스 전체 주거 목적 건물의 14%에 달하는 약 500만 채가 지어졌다. 한국의 공공임대 비중(7%)보다 2배 많다. HLM 이용자는 1100만 명. 6700만 인구의 약 6분의 1이 공공임대주택에 거주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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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주요 선진국 중 공공임대주택 비율이 최상위권에 속한다. 미국(3.3%), 일본(3.1%), 독일(2.9%), 캐나다(4.1%) 등과 비교하면 차이를 쉽게 알 수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프랑스처럼 임대주택 비율이 두 자릿수인 나라는 오스트리아(20.0%), 영국(16.9%), 핀란드(10.5%) 정도에 불과하다. 이날 기자가 찾은 HLM처럼 상당수가 입지가 좋은 곳에 지어지고 있다. 임대료도 저렴해 지난해 말 기준 입주 대기자가 무려 200만 명에 달한다.

HLM은 소득 기준에 따라 저소득층형(PLAI), 표준형(PLUS), 중산층형(PLS)으로 나뉜다. PLAI는 수도권 4인 가구 기준 연 소득 3만521유로(약 4308만 원) 미만, PLUS는 5만5486유로(약 7830만 원) 미만이면 거주가 가능하다. 반면 PLS의 소득 제한은 7만1016유로(약 1억22만 원)이다. 1억 원을 버는 중산층도 임대주택에 살 수 있다는 뜻이다.

○ 임대료 싸고 실직하면 감면

임대료 또한 상당히 저렴하다. 파리 기준 PLAI의 임대료는 m²당 월 5.9유로다. 서민들이 주로 거주하는 60m² 형태는 354유로(약 50만 원)만 내면 된다는 뜻이다. 특히 실직으로 수입이 사라지면 일정 기간 50유로(약 7만 원)만 내는 것도 가능하다. PLUS와 PLS의 m²당 임대료 역시 각각 월 6.7유로, 13.1유로로 크게 부담스럽지 않은 수준이다.

반면 지난해 9월 기준 파리의 평균 주택가격은 m²당 1만 유로(약 1413만 원)를 돌파했다. 특히 시민들이 선호하는 90∼99m²(약 27∼30평) 아파트의 임대료는 월 3500유로(약 495만 원)에 이른다. 이에 상당수 중산층 또한 HLM 입주를 선호한다.

16구에 위치한 HLM 거주자 라리사 씨(39)는 전형적인 중산층 부부다. 그는 대기업의 인사담당자이고 남편은 법조계에서 일한다. 한국에서 좋은 직장을 가진 사람들이 임대주택에 거주하는 사례가 드문 것과는 상반된다. 1구 주민 아나이스 씨(40)는 “파리 집값과 임대료가 비싸서 중산층이라 해도 집을 사거나 매월 수백만 원씩 임대료를 내는 게 쉽지 않다”며 교통과 생활 인프라가 불편한 곳에 내 집을 사느니 요충지의 HLM에 사는 게 낫다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또 다른 HLM 거주자 쥘리앵 씨 역시 “파리 시내와 인근에서는 약 10년, 다른 대도시에서는 최소 8년 이상 대기해야 HLM에 입주할 수 있다. 주변에서 나를 부러워하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HLM 대기자가 200만 명이라는 점이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 임대주택은 ‘소셜 믹스’의 핵심 수단

한국에서는 공공임대주택 확대를 골자로 한 8·4부동산대책이 발표되자 임대주택 부지로 선정된 일부 지역에서 지방자치단체장과 주민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프랑스에서는 이런 갈등이 없을까. 릭도 씨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는 “임대주택이 들어선다고 했을 때 반긴 주민은 많지 않다. 이웃 중에서도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운을 뗐다. 하지만 그는 “집값이 계속 오르니 정부가 저소득층을 배려해야 한다고 보는 사람도 적지 않다. 나도 마찬가지”라고 덧붙였다. 11구 주민 알렉스 씨(38) 역시 “단기적으로 보면 HLM 확대가 여러 문제를 야기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균형발전에 도움이 된다. HLM을 더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HLM의 존재 이유로 ‘사회적 혼합(social mix)과 공존’을 제시한 프랑스 정부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인종, 경제 여건, 교육 수준이 다르더라도 서로 공존해 가는 것이 사회 안정화와 양극화 해소에 도움이 된다는 의미다.

하지만 “HLM이 지어진 후 우리 동네가 슬럼으로 변했다”며 반대하는 지역도 적지 않다.

14일 오후 파리 14구 인근 장티이시(市)에서 만난 일부 주민은 “임대주택 밀집지역이 되면서 마약 등 각종 강력 범죄가 늘었다”고 항의했다. 주민 메이슨 씨는 “임대주택이 들어오면 시끄럽다. 주민들은 발코니를 예쁜 꽃과 화분으로 장식하는데 임대주택 주민들은 보기 민망한 속옷 등 각종 빨래와 잡동사니를 늘어놓는다”고 불만을 표했다.

정부와 지자체는 노후된 HLM을 재건축하는 방식으로 주민 불만을 누그러뜨리고 있다. 장티이시에서는 재건축을 통해 1층에 고급 체육시설까지 갖춘 현대식 HLM을 볼 수 있었다. 비용은 HLM 일부를 민간에 팔아 충당한다. 지난해는 8700채의 HLM이 민간에 팔렸지만 재건축 비용을 충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이 때문에 신축 HLM은 기존 HLM보다 임대료가 약 50% 비싸다.

재건축이나 대규모 HLM 건립이 어려운 대도시 핵심 지역에는 ‘공공임대주택 할당제’를 통해 HLM을 늘리고 있다. 프랑스는 주민 1500명 이상의 대도시 자치구에 “전체 주택 내 HLM 비율을 20%로 유지하라”고 규정했다. 2025년에는 25%로 상향된다. 이 비율을 지키지 못하면 벌금을 내야 한다.

2014년부터 재직 중이며 최근 재선에 성공한 안 이달고 파리시장의 핵심 공약 역시 ‘부촌 내 HLM 확대’다. 지난달 15일 에펠탑 인근의 7구에는 에펠탑이 잘 보이는 최신식 테라스를 갖춘 HLM이, 샹젤리제거리 인근의 8구에도 신축 HLM이 완공됐다. 리치오티가 건설한 16구 HLM과 마찬가지로 유명 건축가가 설계했고 아치형 천장, 옥상 정원, 친환경 목재를 사용했다.

○ 일부 지자체는 할당 무시

일부 지자체는 할당을 거부한다. 파리 부촌인 6∼8구, 16구의 HLM 비율은 전체 주택의 3∼6%에 불과하다. 르피가로는 HLM 목표치를 달성하지 못해 과태료를 내는 지자체가 649곳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남부 르카네시는 이 벌금만 무려 140만 유로(약 20억 원)를 냈다. 일부 주민 역시 “HLM 할당제를 지키느니 차라리 벌금을 내겠다”는 공약을 내건 지자체장을 선호한다.

정부가 HLM의 질적 향상을 추진하면서 극빈층이 공공주택에서 배제되는 문제도 발생한다. 신축 HLM의 임대료가 이들에게는 부담스러운 수준이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중산층형 HLM은 공공임대주택의 도입 취지에 맞지 않으므로 중산층의 입주를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다만 HLM 확대와 질적 향상 정책의 대의(大義)에는 많은 시민이 찬성하고 있다. 15구 주민 레몽 씨는 “HLM이 소셜 믹스의 핵심 수단이라는 점에 공감한다. 저소득층이 부촌의 HLM에 살면서 중산층과 교류할 수 있다면 양측 모두에 이로운 점이 많을 것”이라고 했다. HLM 거주자인 교포 박모 씨 역시 “공공임대주택 확대로 잡음이 생길 때 당국이 이를 방치하면 소득별 계층이 완전히 분리돼 극단적인 인종차별과 사회 분열이 나타날 수 있다”며 “각종 반발에도 부촌에 HLM을 늘리려는 프랑스의 시도를 한국 역시 본받았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김윤종 파리 특파원 zozo@donga.com기자페이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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