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 없는 리그’는 망한다[오늘과 내일/김종석]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5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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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구도 깨지면 인기 식듯이
우리 사는 세상도 독주는 무의미

여자 골프 세계랭킹 1위 고진영(25)은 며칠 전 TV를 보다 눈시울을 붉혔다. 박현경(20)이 KLPGA 챔피언십에서 처음 투어 정상에 오른 뒤 우는 걸 보고 나서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후배 우승에 울컥한 건 처음이다. 루키 시절 나를 보는 것 같았다”고 답했다. 두 선수는 지난겨울 처음으로 미국에서 한 달 넘게 같이 훈련하며 가까워졌다.

박현경은 아마추어 시절 또래 가운데 선두주자였다. 지난해 KLPGA투어에 데뷔해 기대를 모았지만 무관에 그쳤다. 반면 동기 조아연이 2승에 신인왕을 차지했고, 친구 임희정은 3승을 거뒀다. 혼자 뒤처지는 것 같아 속이 상했다. 그래서 이를 악물었다. 프로골퍼 출신 아버지와 처음 떨어져 동계훈련을 했다. 고진영에게 많은 걸 물어봤다. 고진영도 동갑인 김효주, 백규정, 김민선 등과 경쟁하며 마음고생을 했기에 자신을 보는 듯했다.

“진영 언니가 너무 고맙다. 결과적으로 경쟁자들이 좋은 영향을 끼쳤다. 부족한 부분을 채우게 해줬다. 그들이 없었다면 이런 영광은 없었을 것이다.” 첫 승의 꿈을 이룬 박현경의 소감은 남자프로배구 현대캐피탈 최태웅 감독의 성공 스토리를 떠올리게 한다.

그의 경력은 특이하다. 삼성화재에서 11년간 선수로 뛰다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현대캐피탈로 이적해 선수, 감독으로 10년을 보내고 있다. 최 감독처럼 삼성과 현대를 두루 거친 이력은 드물다. “내가 첫 케이스여서 현대로 옮겼을 때 2주 동안 아무 생각이 안 났다. 하지만 서로 다른 두 조직 문화를 통해 성장했다.” “삼성은 절제된 틀에서 체계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방 안의 물건들을 쓴 뒤 꼭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하는 식이다. 현대는 다르다. 똑같이 사용은 하게 해도 정리보다는 활용만 잘하면 그뿐이다.” 유일하게 선수와 지도자로 모두 우승을 경험한 최 감독의 리더십은 관리와 자율이 조화를 이뤘다는 평가를 듣는다.

삼성과 현대는 스포츠에서도 최대 라이벌이다. 1978년 나란히 농구단을 창단하면서 스카우트 전쟁에 불이 붙었다. “삼성에서 이동균이란 선수를 뽑기 위해 제주에 피신시켰는데 현대가 경비행기까지 띄워 데려갔다. 그가 울산 현대영빈관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삼성이 다시 빼돌려 서울로 데려갔다.” 당시 삼성 스카우트담당이던 김운용 전 나인브릿지골프장 대표에게 들은 후일담이다. 현대는 삼성행이 유력했던 이충희를 잡기 위해 서울 강남 아파트 한 채와 현금 등을 쏟아부었다. 삼성은 문경은을 영입하려고 그의 부모를 괌까지 데리고 갔다. 현대의 접촉을 차단할 의도였다. 첩보전 같은 스토리에 팬들은 열광했다.

삼성과 현대의 양강 체제는 농구를 최고 겨울스포츠로 올려놓는 원동력이 됐다. 이충희, 김현준 등 스타들은 화려한 플레이와 투지로 코트를 뜨겁게 달궜다. 후일 기아, 연세대가 아성을 깨뜨리는 과정도 극적이었다. 배구 역시 1995년 삼성화재 창단 후 현대와 삼성의 자존심 대결이 흥행 열기로 이어졌다. 최근 농구의 추락은 맞수 개념이 희석된 것도 원인이다. 한양대 최준서 교수는 “라이벌 구도로 리그의 관심을 끌어올리고 수익 또는 팬 수요를 늘려 그걸 다시 배분하면서 파이를 키울 수 있다. 다만 특정 팀이 독식하는 그들만의 리그가 돼선 안 된다”고 말했다. 연맹, 팀, 미디어는 라이벌의 순기능에 집중해야 한다. 라이벌 없는 리그는 망한다.

라이벌의 어원은 라틴어 리발리스(rivalis)다. ‘남과 같은 하천을 물의 원천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라는 뜻. 치열하게 맞붙은 뒤 승패가 갈리면 악수하는 모습이 비단 스포츠에서만 아름다운 장면은 아닐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라이벌끼리도 손을 잡아야 발전하고 공존할 수 있다. 코로나19를 겪으면서 더욱 그런 세상이 됐다.
 
김종석 스포츠부장 kjs0123@donga.com
#라이벌#경쟁구도#독주#박현경#최태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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