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노지현]부모가 제구실을 못할 때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2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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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지현 사회부 기자
노지현 사회부 기자
서울 마포구의 한 주택가에는 여자 청소년 10명이 생활하는 그룹 홈이 있다. 후원자들이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 주고 싶다”고 부탁해도 담당자는 주소를 철저히 비밀에 부친다. 이곳 아이들이 ‘집’에서 어렵게 탈출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새로운 보금자리는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열림터다. 전국에 28곳이 있다. 친부나 양부에게 성폭력을 당했거나 가족이 피해자를 전혀 보호해주지 못할 때 상담소를 통해 이곳으로 오게 된다.

폐쇄회로(CC)TV 카메라가 출입구에 달려 있어도 아이들은 불안해한다. 자신을 괴롭혔던 사람들이 찾아올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가해자 중 대다수는 가족이라고 불린 사람들이다. 한 상담사는 “세 딸을 성폭행한 아버지가 경찰이 앞에 있어도 ‘내 딸 내가 맘대로 한다는데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할 정도”라며 고개를 저었다.

새 보금자리에서 아이들은 처음으로 정성이 담긴 밑반찬과 따뜻한 밥을 먹는다. 상담사와 사회복지사가 당직을 서며 밤새 이들을 지킨다. 이 아이들의 뒤처진 공부를 보충해 주기 위해 학습지도까지 도맡아 하는 자원봉사자들도 있다. 교통비와 학업에 필요한 비용도 국가 세금과 기부금으로 충당한다. 열림터가 성폭력 피해청소년을 위한 시설이라면 학대 피해아동을 담당하는 아동보호전문기관도 전국에 56곳 있다. 주택가에 그룹 홈을 만들고 가정의 보살핌을 주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동학대나 성폭력 사건이 터지면 인터넷은 들끓는다. “이래서 한국은 멀었다” “어떻게 하루가 멀다 하고 이런 뉴스가 나오나”라며 ‘헬 조선(지옥 같은 한국)’이라고 한탄한다. 과연 사건 수가 늘어난 것일까. 송미헌 열림터 원장은 “과거엔 쉬쉬하면서 신고도 안 했지만 아동청소년 학대 및 성폭력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면서 신고가 활성화됐다”고 분석했다. 수면 아래에 두었다면 몸과 정신이 모두 파괴되었을 아이들이 구출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들의 ‘빨리빨리’와 ‘분노’ 문화가 아동 및 청소년 학대 범죄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부모가 제구실을 못할 때 부모란 탈을 쓴 ‘악마’에게서 아이들을 구출하고 지켜내려는 손길이 더 많아진 것은 반가운 일이다. 정부도 가정에서 구출되고 난 이후의 아이들 삶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상담이나 제보 내용이 인터넷에 올라오면 상담사나 복지사들이 “이리로 찾아와 달라” “대화가 어려우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메시지만이라도 남겨 달라”며 적극적으로 나선다.

그러나 아직도 상담사, 복지사들의 열정과 의지에 지나치게 기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정부의 인건비 지원 기준이 열악하다 보니 열림터의 경우 시설당 3.5명만이 일하고 있다. 10명 또는 그 이상의 아이들을 돌보기엔 부족하다. 특히 트라우마가 있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진심으로 공감해 주려면 훨씬 더 큰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아이들의 ‘엄마’ 역할을 하다 지쳐 떠나는 상담사와 복지사가 나오는 이유다.

학대받는 아이들을 집이라는 감옥에서 빼내는 것도 중요하다. 이제는 그 아이들을 어떻게 잘 돌볼 수 있을지, 다음 단계를 고민할 때다.

노지현 사회부 기자 isityo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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