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전남 여수국가산업단지 내 여천NCC 2공장. 제품 생산 시설이 원료 및 제품 이동 통로인 수송관들과 복잡하게 얽혀 있다. 여천NCC 관계자는 “공장이 멀리 떨어져 있으면 관이 길어져야 하기 때문에 제품과 원료를 수송하는 데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여수=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돌산을 녹지로 보호하고 있는 규제가 빨리 풀리지 않으면 회사 건물을 허물고 그 자리에 공장을 지어야 할 판입니다.”
15일 전남 여수국가산업단지에서 만난 한화케미칼 관계자는 이같이 말했다.
정부는 11일 제2차 무역투자진흥회의를 열고 여수산단 내 녹지 일부에 공장 증설을 허용하는 등 기업 투자를 가로막던 여러 규제를 풀겠다고 발표했다. 기업들이 규제 완화 효과를 얼마나 체감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대표적인 규제 완화 수혜 지역으로 꼽히는 여수산단 내 기업을 찾았다.
○ ‘돌산’에 성장 묶인 여수산단
여수산단에서 에틸렌 등 석유화학 원료를 생산하는 여천NCC 2공장은 기형적으로 ‘ㄷ’자 모양의 터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공장 터 한쪽에 작은 산이 하나 버티고 있고 각종 시설들은 이 산을 피해 들어서 있다. 언덕 왼편과 오른편에 흩어져 있는 생산설비들은 돌산 주변을 빙 두르는 파이프라인으로 연결돼 있다.
이 산이 정부가 공장용지로 개발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한 바로 그 ‘녹지’다. 대부분 암반으로 이뤄져 있어 이곳 사람들은 ‘돌산’이라 부른다. 나무가 심어져 있기는 하지만 공장들에 둘러싸여 있고 경사가 가파르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물론 공장 사람들도 들어갈 수 없다. 사실상 녹지 기능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수산단에서 녹지로 보호되는 대부분의 땅은 이처럼 공장 근처에 있는 이름 없는 돌산들이다. 한화케미칼, GS칼텍스, 롯데케미칼, KPX화인케미칼 등 산단 내 주요 기업의 공장 주변에 마치 ‘섬’처럼 존재하고 있다.
실제 섬이었던 곳도 있다. GS칼텍스가 바다를 매립해 공장을 증설하면서 당초 섬이었던 ‘우순도’는 공장 안으로 편입됐는데 지금까지 녹지로 남아 있다. 한 여수산단 기업 관계자는 “이 같은 녹지는 정부가 애초 단지를 분양할 때 기업에 반강제로 떠맡긴 것”이라며 “소유권도 대부분 기업이 갖고 있고 공장을 세울 공간으로 적합한데도 그동안 녹지 비율 규제 때문에 개발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녹지 비율 규제란 ‘산업입지의 개발에 관한 통합지침’ 제14조에 근거한다. ‘산단의 규모가 300만 m² 이상이면 전체 면적의 10% 이상, 13% 미만의 녹지를 보유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기업들은 여러 해 전부터 공장 내 녹지 개발계획을 전남도와 여수시에 제출했지만 이 조항 탓에 매번 반려됐다. 한 기업 관계자는 “석유화학은 배관을 통해 원료와 제품이 이동하는 산업의 특성상 공장들이 모여 있어야 효율성이 생긴다”며 “녹지가 필요하다면 산단 주변에 제대로 대체 녹지를 조성해 시민들이 휴식도 취하고 환경보호도 하는 게 나을 것”이라고 하소연했다.
○ “투자는 타이밍” 애달픈 기업들
녹지를 공장 터로 전환해주겠다는 계획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에도 정부는 경제활력대책회의를 열고 녹지 규제완화를 약속한 바 있다. 하지만 실제로 진행되지는 않았다. 이런 전력(前歷)이 있기 때문에 기업들은 이번 정부 발표에도 ‘진짜 될까’ 하는 의구심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기업들은 “투자는 타이밍이다. 제발 빨리 현실화됐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한화케미칼 관계자는 “석유화학산업은 호황과 불황의 주기가 있는데 불황기인 지금이 투자의 적기”라며 “빨리 공장을 지어 호황 때 새로운 물건을 싼값에 생산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규제가 빨리 풀리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것에 대비해 대안으로 공장 내 업무지원 시설을 부수고 그 자리에 공장을 세우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멀쩡한 건물을 부수고 사무실을 새로 이전하는 데는 300억 원의 비용이 추가로 든다. 하지만 제때 투자하지 않으면 공장 증설 타이밍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GS칼텍스 관계자는 “뒤쪽은 산에, 앞쪽은 바다에 막혀 있다”며 “외국 기업과 경쟁하기 위해선 고(高)부가가치 제품을 만드는 공장을 더 많이 지어야 한다. 2005년부터 올해까지 매년 1조 원 이상을 투자해 공장을 짓고 있는데 이제 더이상 땅이 없다”고 했다.
중소기업들은 더 다급하다. 우레탄의 중간 원료인 TDI를 생산하는 KPX화인케미칼 관계자는 “대기업들이야 어느 정도 규모가 있기 때문에 경기가 어려워도 버틸 수 있지만 우리 같은 기업은 생산량을 늘려 제품 단가를 낮춰야 살아남을 수 있다”며 “제발 이번에는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여수산단에서 건설 및 공장 유지·보수 업체를 운영하는 한 중소기업인은 “대기업이 투자를 해야 우리 같은 중소기업들도 일감이 늘어난다”고 강조했다.
여수시는 현재 녹지 해제 기준을 마련하기 위한 타당성 조사를 하고 있다. 시는 조사를 마친 뒤 녹지를 공장용지로 활용하려는 기업의 신청을 받아 내년에 전남도에 개발계획 변경 신청을 할 계획이다. 여수시 관계자는 “도에 변경신청을 한 뒤에도 관련기관 협의 등의 과정이 남아 있어 개발계획 변경 승인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 기업 관계자는 “내년에 지방선거라는 변수가 있어서 얼마나 빨리 일이 진행될지 걱정”이라면서 “몇 년 전부터 기업들이 요청한 사안인데 아직도 검토를 해야 할 게 더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며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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