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알같은 글씨로 감춘 ‘불편한 진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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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작은 식품성분 표기

“이 글씨 읽을 수 있으세요?”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L사 과자 포장지. 영양성분표시가 너무 작아 돋보기를 사용해야만 원재료명 등을 확인할 수 있어 소비자들의 불만을 사고 있다. 이기진 기자 doyoce@donga.com
“이 글씨 읽을 수 있으세요?”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L사 과자 포장지. 영양성분표시가 너무 작아 돋보기를 사용해야만 원재료명 등을 확인할 수 있어 소비자들의 불만을 사고 있다. 이기진 기자 doyoce@donga.com
주부 배영옥 씨(48·대전 서구)는 대형마트에 갈 때 돋보기를 갖고 다니는 습관이 생겼다. 식품 포장지에 표기된 열량과 나트륨, 지방 등의 영양성분을 확인하는데 글씨가 너무 작기 때문이다. 배 씨의 시력은 좌우 1.0이지만 포장지 글씨는 돋보기 없이는 읽을 수 없을 정도라는 것. 그는 “상품명은 지나치게 큰 데 비해 국민건강과 직결된 성분표시는 너무 작다”며 “식품회사들의 ‘불편한 진실’을 감추려는 상술”이라고 지적했다.

가공식품과 관련한 각종 정보를 소비자들에게 제공해 비만과 당뇨 고혈압 등으로부터 국민건강을 지키기 위해 1994년 도입된 식품표시기준제가 무용지물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23일 오후 대전 서구 둔산동의 한 대형마트 식품코너. 임모 씨(51·여)는 국내 유명 라면업체에서 생산한 컵라면을 집어 들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안경도 벗어보고, 환한 곳으로 옮겨 읽으려 했지만 컵라면 포장지에 쓰인 지방 나트륨 등의 함량이 어느 정도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임 씨는 “비만인 아들이 컵라면을 너무 좋아해 지방함량이 적은 제품을 구입하고 싶지만 글씨가 작아 알아볼 수 없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현행 식품위생법에는 모든 가공식품의 포장과 용기에는 원재료와 제조일자 유통기한 영양성분함량 등을 의무적으로 표기해야 한다. 표기방법도 원재료는 함량이 많은 순서에 따라 성분(탄수화물 지방 나트륨 등)은 ‘%’로, 합성감미료 발색제 등 첨가물은 그 내용을 표기해야 한다.

문제는 ‘글자 크기’다. 상표와 제조연월일 유통기한 등은 관련법에 ‘10포인트 이상’으로 표기하도록 돼 있다. 그러나 소비자들의 관심이 높은 지방과 칼로리 나트륨 등 성분과 L-글루타민산나트륨(MSG) 등 첨가물 표기는 ‘7포인트 이상’이라고만 정해졌다. 이런 규정이 식품제조회사들의 ‘불편한 진실’을 가려주는 ‘우산’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최근 유명 연예인이 광고모델로 출연한 B라면은 100g당 열량이 450kcal로 타사 제품보다 훨씬 높다. 하지만 영양성분표시는 검은 포장에 빨간 글씨여서 읽기가 쉽지 않다. S사 제품의 N컵라면(포장단위 65g)도 나트륨 함량이 1320mg으로 컵라면 하나만으로도 세계보건기구(WHO)의 하루 나트륨 섭취 권장량(2000mg)을 넘는 수준. 하지만 제품 용기가 작은 데다 글씨도 빼곡하게 적혀 있어 무슨 성분이 얼마만큼 들어있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H제과 초콜릿과자는 대부분 수입 재료로 만들어졌으나 성분표시는 포장지가 접히는 안쪽에 교묘하게 쓰여 눈에 띄지 않는다.

박영규 안과전문의(51·충북 청주시)는 “정상 시력인 40, 50대 주부들이 7포인트 크기의 글자를 읽는 것은 쉽지 않다”며 “특히 노안이 진행되는 50대 여성의 경우 80% 이상 읽기 어려운 크기”라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글씨와 바탕 색깔, 판매장소 조명에 따라서는 아예 읽지 말라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했다.

식품제조회사들은 이처럼 유해성분을 감추는 데 급급해하면서 관련법상 표기가 허용된 ‘저지방’ ‘저콜레스테롤’ ‘식이섬유 풍부’ ‘저칼로리’ 등의 문구는 애써 키우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청 관계자는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식품 표시기준을 강화할 필요를 느끼고 있다”며 “유통기한 표시 글자를 확대하는 등 다양한 대책을 마련 중”이라고 말했다.

김미리 충남대 교수(식품영양학과)는 “소비자들은 자신이 먹는 식품에 대한 정보를 명확하게 알 권리가 있다”며 “특히 어린이들이 많이 섭취하는 고열량 저영양 식품인 과자와 음료 등에 대해선 표시기준을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식품을 선택하는 소비자도 식품표시를 확인하는 걸 습관화하고 지속적으로 개정을 요구할 필요가 있다”고 당부했다.

대전=이기진 기자 doyoce@donga.com
#과자#식품영양성분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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