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부터 방송계 대표적 병폐로 지적돼왔던 '막장드라마'가 색다른 위협을 맞게 됐다. '광고 완판'을 노리며 막장 요소들을 다수 집어넣었던 게 바로 막장드라마 생성원리였는데, 오히려 광고주들 측에서 막장드라마를 제어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동아일보 3일자 기사 '광고주協 "막장드라마 제작 자제를"'에 따르면, 한국광고주협회는 서울YMCA 시청자시민운동본부가 1일 발표한 '막장드라마 워스트(최악의) 5'와 관련해 방송사 드라마 제작 개선에 적극 나서겠다고 2일 밝혔다.
협회는 각 방송사에 막장드라마 제작을 자제하고 유익한 드라마 제작을 확대해 달라는 요구를 전달할 계획이다. 또 내용의 건전성을 잣대로 광고 집행을 하도록 회원사들을 독려하고, 각 광고주와 협력해 좋은 드라마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기로 했다.
아울러 시민단체의 드라마 모니터링 사업도 지원하기로 했다. 이에 앞서 서울YMCA는 광고주협회에 "광고 및 협찬 없이는 드라마 제작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협회가 막장드라마 개선에 적극 협력해 달라"고 요청한 바 있다.
●객관적 기준을 제시할 수 없는 막장드라마 판정
한국광고주협회의 이 같은 선언은 어찌됐건 충격적인 일이긴 하다. 물론 광고를 '시청률이 아닌 다른 잣대'로도 집행하겠다는 발상은 딱히 생소하다 보긴 힘들다.
지금도 그런 발상에서 집행되는 광고들이 많다. 다큐멘터리 등 상업성이 떨어지는 '착한' 프로그램에도 광고는 붙는다. 기업이미지 차원에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선언'이 이뤄졌다는 건 조금 다른 차원에서 해석될 필요가 있다. 광고주들이 '공개적으로' 방송 컨텐츠에 개입하겠다는 선언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른바 '착한드라마'에 상 주는 차원 정도에서 크게 벗어난다. 그러니 이를 두고 신생 종합편성채널들과의 줄다리기 관계에서 비롯된 선언이 아니냐는 해석까지 나오게 되는 것이다.
협회 측이 "방송 채널 확대에 따른 드라마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것이 예상된다"며 "지상파 방송3사 및 개국을 앞둔 종편 4개사에 막장드라마 근절 및 유익한 드라마 제작을 위해 노력해줄 것"을 콕 집어 당부한 부분에서도 이 같은 배경이 언뜻 읽혀지기도 한다.
대표적 막장드라마 '아내의 유혹' 한 장면.그러나 그런 역학관계 추적을 떠나서도 한국광고주협회의 이번 선언은 여러모로 문제가 많다. 좀 우스운 일이긴 하지만, '막장드라마를 제어하겠다'고 말은 해놓았는데, 막상 막장드라마가 대체 무엇인지에 대해서조차 명확히 규정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일련의 경향으로서 비판할 수는 있지만 콘텐트 하나하나에 특정잣대를 들이대 가려낼 수가 없다. 이번 협회 측 선언을 이끌어낸 서울YMCA의 판단기준만 해도 그렇다.
서울YMCA 측은 ▲선정성 ▲폭력성 ▲비윤리성 ▲비현실성 ▲현실 왜곡 등을 막장요소로 설정, 올해 7월부터 지난달까지 지상파방송사에서 방송된 드라마 28편을 모니터했다.
그렇게 해서 MBC '반짝반짝 빛나는'이 막장드라마 1위에 오르게 됐다. 총 방송시간 720분 중 막장요소 노출시간이 173분으로 전체의 24.1%에 해당됐다는, 대단히 구체적인 자료가 제시됐다.
그런데 대체 어디서부터가 선정적인 것이고 어디까지는 아닌지, 어디서부터가 비현실적인 것이고 어디까지는 아닌지, 막장요소의 판단기준들부터 모호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사실 아무리 많은 연구와 검토가 이뤄져도 명확한 기준이 나올 수가 없다.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 뺨을 때리는 흔하디흔한 드라마 설정을 예로 들어보자. 이를 과연 폭력성으로 봐야할지 아니면 그저 남녀갈등의 클리셰적 표현 정도로 봐야할지조차 영원히 결론날 수가 없는 상황이다.
어쩌면 여자주인공이 남자주인공 뺨을 때리면 클리셰에 불과하지만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 뺨을 때리면 폭력이라는, 다분히 페미니즘적인 시각이 대두될 수도 있다. 그러면 또 논란이 불거질 수 있다.
또한 다큐멘터리조차 뭔가 특이한 인물이나 사건 등을 소재로 삼는 현실에서, 이른바 극성(劇性)을 유지해야 하는 드라마가 비현실성, 현실왜곡 등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있는 날이 과연 올는지조차 의구심이 인다.
그러니 "총 방송시간 720분 중 막장요소 노출시간이 173분"이라는 식 통계자료가 나올 수 있다는 점 자체가 아예 말이 안 된다는 얘기다. 그야말로 '내 맘대로 기준'일 뿐이고 '내 맘대로 막장'일 뿐이다.
●문제는 설정·소재가 아니라 주제·태도다
애초 막장드라마를 막장요소라는 설정 상 장치들을 기준으로 판단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는 의견도 많다. 물론 막장드라마란 용어가 쓰이기 시작한 이유가 바로 그런 장치들의 남발 때문이 아니겠냐는 입장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입장에는 다음과 같은 반박이 가능하다.
예컨대 이런 설정은 어떨까. 친형의 모든 것이 탐나 결국 그를 살해한 뒤 형수와 결혼하고 권력과 부를 움켜쥔 남자, 그리고 그 남자에 복수의 칼날을 가는 그의 조카. 충분히 선정적이고 비윤리적이며 폭력적일뿐더러 현실왜곡적인 부분도 발견할 수 있는 설정이다.
막장드라마가 아닐 수 없다.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이는 만고불변의 클래식으로 인정받는 윌리엄 셰익스피어 희곡 '햄릿'의 설정이다.
이런 건 어떨까. 자기 어머니의 연인과 정(情)을 통하는 파렴치한 짓을 저지른 한 처녀가, 남자에게 버림받고 그에 살해시도까지 벌이고는 또 다시 유부남과 불륜을 저지르게 된다.
선정성, 폭력성, 비윤리성 측면에서 가히 극단까지 올라있다. 충분히 막장스럽지 않나? 그러나 이는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노벨문학상 수상작 '닥터 지바고' 설정이다.
물론 '햄릿'이나 '닥터 지바고'는 문학작품으로선 높이 평가받을 수 있지만, 온 가족이 보는 TV드라마로는 부적합한 소재라는 반론도 나올 수 있다. 그런데 '햄릿'이나 '닥터 지바고'의 영화판이 TV에서 수없이 방영되는 동안, 단 한 번이라도 이에 비판이 나온 적이 있었던가. 오히려 간만에 볼 만한 클래식이 방영된다며 칭찬이 자자하지 않았던가.
결국 대중이 막장드라마란 용어까지 만들어내며 비판분위기를 형성했던 건, 적어도 서울YMCA 측 기준처럼 설정 상 장치나 소재 차원에서 기계적으로 해석될 일은 절대 아니었단 얘기다.
대표적 막장드라마 '아내의 유혹' 한 장면.예컨대, 갖가지 막장요소들을 다 집어넣고도 '좋은드라마' '착한드라마' 소릴 들었던 사례도 뚜렷이 존재한다. MBC '커피프린스 1호점'이다.
액면 그대로만 보면 사촌과 연애하던 여자에 추파를 던지는 남자를 중심으로, 출생의 비밀, 신분위장, 동성애, 빈부갈등 등 막장요소들이 넘실대던 드라마다. 그렇지만 대중은 그런 설정상의 장치나 소재들로 '커피프린스 1호점'을 판단하진 않았다.
결국 문제는 설정과 소재를 다루는 '태도', 그리고 그 설정과 장치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에 달려있었단 얘기다. 앞선 '햄릿' '닥터 지바고' 경우와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아무리 표현수위가 낮고 잔잔한 일상만을 다루는 드라마더라도, 그 태도와 주제가 통속적인 수준에 머물면 그냥 통속적인 드라마로만 치부된다. 반면 아무리 표현수위가 높고 자극적인 설정들을 집어넣은 드라마더라도, 그 태도 면에서 통속적이지 않고 주제의식이 참신하고 뚜렷하면 막장드라마 소린 절대 듣지 않는다.
●누구도 주제와 태도를 객관화시켜 평가할 수는 없다
물론 서울YMCA나 한국광고주협회 측에서 이런 점들까지 모두 감안해 판단하겠다고 공표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래도 여전히 막장드라마의 기준과 규정 설정엔 딜레마가 남을 수밖에 없다.
그나마 엉터리긴 해도 객관적 기준이라도 만들 수 있었던 설정상의 장치 및 소재 차원에 비해, 태도와 주제의 문제는 사실상 더없이 주관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모두 인식하는 방식과 받아들이는 태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누군가에겐 통속적인 주제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는 인생을 바꿔놓을 만한 남다른 주제일 수도 있다. 같은 기업드라마더라도, 누군가에겐 건전한 도전정신과 사회적 진취성을 일깨우는 글로벌 마인드 육성 드라마일 수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는 배금주의를 토대로 한 신자유주의와 정글 자본주의 예찬 드라마일 수도 있다.
대체 누가 이런 부분을, '시청자'라는 포괄적 소비층을 대변해 판단내릴 수 있단 말인가. 결국 많은 부분에서 서울YMCA와 한국광고주협회 측 '막장드라마 제어' 발상은, 의미나 의도 면에 있어선 절대 나쁜 것이 아닐지라도, 사실상 미국 영화등급위원회의 NC-17 발상처럼 허랑한 것이 될 가능성이 높다.
NC-17도 처음엔 가히 혁명적인 등급 제도처럼 여겨졌다. 미국에선 1980년대까지만 해도 선정적이거나 폭력적인 묘사가 너무 과도하다 평가받은 영화들은 모두 등급 외로 판정, X등급이란 딱지를 붙이고 나와야했다. 등급 외 판정을 받은 영화들은 미디어에서의 광고가 금지됐고, 배급에서도 불이익을 많이 받았다.
그러자 충분히 예술적인 가치가 있음에도 표현수위 문제로 등급 외 판정을 받은 영화들에 상업적 구제조치가 필요하단 의견이 대두됐다. 등급 외 판정을 받았던 '미드나이트 카우보이'가 아카데미상 작품상을 수상한 1970년부터 이미 20년 가깝게 제기돼온 의견이었다.
결국 그렇게 해서 '17세 이하는 절대 볼 수 없지만, 미디어 홍보 등 측면에선 다른 영화들과 똑같은 권리를 준다'는 개념의 NC-17, 즉 No Children Under 17이란 등급이 1990년 탄생하게 됐다. 필립 카우프먼 감독의 1990년작 '헨리와 준'이 그 첫 수혜자가 됐다.
그러나 이 NC-17은 이후 미국 영화등급위원회의 꾸준한 골칫거리로 전락해버렸다. 대체 어떤 영화가 '예술적 가치가 있는 영화'인지 누가, 어떻게 판단하느냐는 문제 때문이었다.
같은 컨텐트더라도 누군가엔 그저 단순 포르노로만 보이지만, 또 누군가엔 충분히 논의될 만한 주제를 지닌 컨텐트로 보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 한동안 거의 매 컨텐츠마다 같은 종류 논란이 불거지게 됐고, 이런 논란들을 겪으며 NC-17은 서서히 유명무실한 등급으로 그 기능이 추락해버리고 말았다.
나중엔 NC-17을 받을 수 있는 영화들도 그냥 등급 외 판정을 받은 뒤 DVD 등 2차 시장에 주력하는 전략으로 전환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NC-17 소동은 문화예술상품의 제도화 과정에서 절대 흡수해선 안 될 부분이 바로 콘텐츠에 대한 주관적 판단 부분임을 방증한 대표적 사례로 볼 수 있다. 한국의 막장드라마 규정은 이 같은 20여 년 전 미국의 실수를 그대로 답습하는 격이란 얘기다.
●대중의 소비 트렌드에 억압 가하겠다는 반(反)시장적 발상
이런 점들을 다 떠나서도, 애초 한국에서 막장드라마란 용어는 대체 어떤 계기로 탄생됐는지부터 돌아봐도 판정이니 기준이니 하는 얘기 따위 아예 나올 필요가 없었을 수도 있다. 막장드라마는 어떤 특정 경향이 전체 방송드라마 구도에서 두드러지게 됐을 때 곧바로 등장한 용어다.
대표적 막장드라마 '조강지처 클럽' 한 장면.정확히는, 막장 요소가 강한 드라마들이 평일 아침과 저녁 8시 시간대에서 벗어나 주말과 평일 10시 시간대까지 진출하면서 이에 불만을 느낀 대중이 만들어낸 용어다. SBS '조강지처 클럽'이 방영되던 2008년을 중심으로 이 같은 현상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이후 막장요소가 강한 드라마들은 서서히 평일 10시에서부터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주말 10시에서도 2008년 당시처럼 노골적인 막장드라마는 사라져갔다. 이어 막장드라마 고정 시간대인 저녁 8시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올해 상반기까지 큰 인기를 모은 KBS1 '웃어라 동해야'의 경우 막장드라마 핵심으로 불렸던 2008~2009년의 SBS ' 유혹'에 비해 막장성은 크게 떨어져 있었다.
결국 막장드라마란 일시적 컨텐츠 트렌드에 불과한 것이었단 얘기다. 지금 막장드라마라 불리는 드라마들 중엔 2008년 기준으로 딱히 그렇게 불릴 이유가 없는 드라마들이 많다. 사실상 한국드라마는 1970~2000년 사이에도 꾸준히 그 정도 설정과 소재들을 취해온 역사가 있다.
한국대중이 원래 좋아하는 소재와 설정이 그런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저 2008년 당시 만들어진 용어가 관성적으로 사용되고 있다고밖에 달리 생각할 방도가 없다. 그런 점에서 막장드라마란 사실상 이미 '끝난' 트렌드라고 봐야한다.
이렇듯 대중의 선택에 의해 자연스럽게 트렌드가 오고가는 게 바로 시장의 구조다 보니, 특정 단체나 기관이 이에 감 놔라 배 놔라 한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더 어색한 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표현의 수위 차원에서 방송통신심의위 징계가 더 강화될 필요는 있지만, 그 외에 소재나 설정 차원에서 압박을 가한다는 건 사실상 방송소비자들의 요구와 선택권을 침해하는 발상에 가깝다. 지극히 반(反)시장적인 발상이란 얘기다.
다시 앞선 '닥터 지바고'와 '햄릿'의 딜레마로 돌아가 보기로 하자. 마침 옆 나라 일본에선 현재 니혼TV 드라마 '가정부 미타'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가정부 미타'는 한국에선 아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극단적 막장 요소들을 다수 끌어안고 있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극 중심이 되는 한 가정 내에서, 아버지는 불륜을 저지르고, 어머니는 자살하고, 고교생 큰딸은 남자친구 집에서 버젓이 자고 들어오고, 큰아들은 폭력을 휘두르다 경찰에 붙잡힌 뒤 집에 돌아와선 가정부 옷을 벗긴다.
유치원에 다니는 막내딸은 2층 베란다에서 뛰어내리겠다며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추락한다. 최근 방영분에선 가정부가 큰딸을 식칼로 찌르려 달려드는 장면까지 등장했다. 서울YMCA가 내걸었던 ▲선정성 ▲폭력성 ▲비윤리성 ▲비현실성 ▲현실왜곡 등 기준을 올 클리어하고 있는 설정이다. 막장 중의 막장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 대한 일본 대중과 평단의 평가는 지극히 호의적이다. 그저 상업적으로만 성공한 게 아니라 실제로 '좋은 드라마' 소릴 듣고 있단 얘기다.
이는 일본과 한국 사이 문화 환경 차에서 비롯된 일이 아니다. 실제로 이 드라마는 모든 종류의 극단적 설정들을 짊어진 뒤, 그 안에서 개인주의 만연으로 붕괴돼버린 현대일본가정 면면을 정확히 진단하고, 가족 구성원들 간 진정한 유대와 결속의 의미를 날카롭게 제시하고 있다. 명확한 주제의식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수많은 막장 설정들이 드라마 내에서 적확하게 기능하는 드라마란 얘기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현 시점 진정 막장드라마로 비판받아야할 드라마들이란, 막장요소가 많네 시간배분이 어쩌네 하는 차원을 떠나, '할 얘기'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조차 마땅히 없으면서 공연히 시청자들의 시간만 빼앗는 드라마들일 수도 있다는 의견이다.
이문원 대중문화평론가 fletch@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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