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호 여사 인터뷰]“北 유아 위해 털모자 뜨개질… 1만개 꼭 전달하고 싶어”

  • Array
  • 입력 2011년 8월 11일 03시 00분


코멘트
이희호 여사.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이희호 여사.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이자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인 이희호 여사(89·사진)는 10일 “정부가 (저에 대한) 북한의 초청을 허락한다면 북한에 가보고 싶다”고 밝혔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 서거 2주기(18일)를 맞아 서울 마포구 동교동 자택에서 이뤄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6·15 정상회담 10년째였던 2010년 북측에서 정식으로 초청이 왔으나 천안함 연평도 사건, 북핵 문제 등으로 남북관계가 악화돼 방북하지 못했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 여사는 “제 방북이 남북 화해, 관계 회복에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가보고 싶다”며 “2000년(6·15 정상회담 때) 만났던 분들도 다시 만나고 남편의 국장(國葬) 때 북한이 조문특사단을 보낸 데 대해서도 사의를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저의 방북은 정부가 허가를 해줘야 가능한 사안”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앞서 북측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는 지난해 4월 10일 김대중평화센터 앞으로 보내온 팩스 통지문에서 “6·15 공동선언 발표 10돌을 뜻 깊게 기념하기 위해 6월 중순 평양에서 북남 공동학술토론회를 진행하자”며 “토론회에는 이희호 이사장을 비롯한 6·15 상봉 관계자들도 참가하면 좋을 것”이라고 제안했었다.

이 여사는 “현 정부 들어 남북은 대화가 중단됐고 대치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남북 정상이 만나야만 풀 수 있다. 정상들이 (남북 화해 등을) 합의해 실천에 옮겨야 한다”며 “우선 특사를 파견해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남아도는 쌀도 굶주리는 북한 주민들을 위해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북한은 이념은 달라도 우리의 형제”라고 말했다.

이 여사는 차기 대선 구도와 관련해 “이명박 대통령의 후임은 (대선) 시기가 임박해 누가 (각 진영의) 후보가 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라고 전제하면서 “야권 단일 후보는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사람이 돼야 하지만 아직은 (인물이) 눈에 띄지 않는다”고 말했다.

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 DJ서거 2주기 맞아 쏟아놓은 그리움, 그리고 아쉬움

18일이면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2주기다. 동아일보는 10일 서울 마포구 동교동 김 전 대통령의 자택에서 김 전 대통령의 부인이자 평생 동지였으며 현재는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을 맡고 있는 이희호 여사(89)와의 인터뷰를 갖고 김 전 대통령과의 추억, 남북관계에 대한 견해 등을 들어봤다.

이 여사에게선 구순이란 나이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악수를 하면서 느낀 악력(握力)도 상당히 강했다. 인터뷰 내내 허리를 편 꼿꼿한 자세였다. 남북관계에 대한 답변을 할 때는 똑부러진 목소리에 한층 더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야권통합 등 정치 현안에 대해서는 "답하기 어렵다"며 말을 아꼈다.

2시간 가까이 이어진 인터뷰는 석류나무 등이 심어진 정원이 한 눈에 들어오는 자택 응접실에서 이뤄졌다. 꽃과 새를 유난히 좋아했던 김 전 대통령이 서거 전까지 돌보던 정원이다. 이 여사는 "남편이 떠난 지금도 낮 12시가 되면 참새들이 모이를 먹으려 모여든다"며 한참 동안 정원을 바라보기도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남편 생일에 유독 보고 싶어"

―김 전 대통령 서거 2주기(18일)가 다가옵니다. 언제 가장 뵙고 싶으신가요.

"특별한 날이 오면…(잠시 침묵). 아이들 생일이나 남편 생일 등이 되면 유독 보고 싶습니다. 주일(일요일)에도요. 주일엔 남편은 성당에 가고, 나는 교회에 가고 했는데….(이 여사는 기독교, 김 전 대통령은 천주교 신자였다)"

10일 서울 마포구 동교동 자택 응접실에서 벽에 걸린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진을 보다가 눈시울을 붉힌 이희호 여사.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0일 서울 마포구 동교동 자택 응접실에서 벽에 걸린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진을 보다가 눈시울을 붉힌 이희호 여사.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매주 화요일과 토요일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 서울현충원의 김 전 대통령 묘역을 찾고 계십니다. 가실 때마다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요.

"하늘 나라에서 편안히 쉬시리라 믿습니다. 상상하기 힘든 인생을 사셨잖아요. 가족들 소식도 전해드리고 있습니다."

―참 건강하십니다.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십니까.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규칙적으로 생활합니다. 세 끼 모두 시간을 맞춰 먹는데, 점심이 가장 맛있어 넉넉히 들고 그러다보니 저녁은 조금만 먹게 됩니다."

―특별강연 등 외부 활동이 상당히 많습니다. 하루 일과는 어떻게 되십니까.

"시간과 건강이 허락하는 한 초청에 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리는 하지 않고 있습니다. 주로 아침에는 신문과 성경을 읽고 오후에는 집으로 찾아오는 분들을 만나곤 합니다. TV를 시청하거나 책을 읽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낮에는 쉬지 않고 세상일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으로서 앞으로 어떤 활동에 초점을 맞추실 계획입니까.

"김대중평화센터는 남편의 유지를 계승하는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6월에는 6·15 공동선언, 12월에는 노벨평화상 수상 기념행사를 주최하고 있습니다. 남편이 살아계실 때부터 해온 일입니다. 저는 매달 장애우 등 불우이웃 시설을 방문해 원생들과 선생님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형편이 허락하는 한 계속하려고 합니다. 또 외국을 방문해 남편의 생애와 남편이 남긴 정신과 가치에 대해 말해주고 싶습니다."

이 여사는 올해 들어선 원광대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 광주 용연중, 인천 국제심포지엄, 전남 순천 매산여고 등에서, 지난해엔 중국 선전과 홍콩, 미국 포틀랜드와 시애틀의 대학, 국제학교, 한인여성봉사회 등을 방문해 남북관계, 과거 민주화운동 시절 등에 관한 강의를 했다.

―세 분 아드님은 재야 인사의 아들로서 숱한 고초를 겪었고, 김 전 대통령이 대통령이 된 뒤에도 순탄치 않았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그건 좀 넘어갔으면…."

잠시지만 이 여사의 얼굴엔 그늘이 졌다. 세 아들은 아버지로 인해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했고, 김 전 대통령과 이 여사는 늘 이 부분을 마음 아파했다. 특히 장남 김홍일 전 의원은 1980년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등으로 구속됐을 때 고문 후유증으로 발병한 파킨슨 씨 병으로 투병 중이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 집권 후 막내 홍걸 씨는 2002년 5월 체육복표 사업자 선정 등과 관련한 기업들로부터 청탁과 함께 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가 집행유예로 풀려났고, 같은 해 6월 둘째 아들 김홍업 전 의원도 비슷한 혐의로 구속됐다. 김 전 대통령 재임 중 두 아들이 구속된 것이다. 김홍일 전 의원은 2003년 나라종금 로비 사건으로 검찰 조사를 받았고 2006년 9월 집행유예 3년의 형이 확정돼 의원직을 잃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기뻤던 일은 무엇이었고, 가장 힘들 때는 언제셨습니까.

"가장 기뻤던 때는 1973년 남편이 일본에서 납치당한 뒤 살아서 돌아오셨던 때입니다. 남편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돌아가신 줄 알았는데 살아오셔서 너무 기뻤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대통령에 당선(1997년 12월)됐을 때,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됐을 때(2000년 12월) 기뻤습니다. 힘들었을 때는 1980년 5월(17일) 남편이 연행돼 행방을 8월 초까지 모르고 있었을 때입니다. 당시 저는 연금상태였습니다. 그 때는 참으로 불안하고 힘들었습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부인 권양숙 여사와 짧게나마 여행(6월 11~13일)을 다녀왔습니다. 무슨 말씀을 나누셨습니까.

"권 여사가 노 전 대통령 추모 행사(5월 23일 서거 2주기)를 치르고 힘들 것 같아 '바람이나 쐬자'고 제안해 전북 무주와 충남 안면도를 다녀왔습니다. 권 여사가 힘든 시간들을 잘 이겨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 전 대통령의 자서전이 서거 후 발간됐습니다. 아쉬운 부분은 없으셨는지요.

"없는 것 같아요. 한꺼번에 그냥 쓴 게 아니고 오랜 기간을 두고 조금씩 쓰신 것이어서 거의 다 들어있습니다."

―김 전 대통령 자서전 번역 출간 요청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이미 번역본이 출간됐습니다. 중국은 교섭이 끝나 준비 중입니다."

●"남녀 동등 먼저 실천한 남편"

―김 전 대통령이 서거 전 37일 간 입원 치료를 받았습니다. 여사님께 남기신 말은 없는지요.

"남편은 당시 기도를 뚫어 미음, 죽을 투입하고 있었습니다.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루 두 번 면회를 할 수 있었지만 가봤자 대화를 할 수는 없었어요. (서거 전 어떤 말도 듣지 못해) 지독하게 아쉬웠죠."

김 전 대통령 서거 직후였던 2009년 9월 박지원 당시 민주당 정책위의장은 김 전 대통령이 '정세균 대표(당시)를 중심으로 통합하라'는 유훈을 남겼다고 말해 이른바 '유훈 논란'이 일었었다. 그러나 이 여사의 설명을 들어볼 때 김 전 대통령은 서거 전 특별한 언급을 남기지 못했던 것 같다.

―김 전 대통령은 서거 직전까지 '민주주의의 위기' '행동하는 양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남편은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사셨습니다. 죽음의 고비도 몇 차례 있었습니다. 남편은 현 정부 들어와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모습을 보고 크게 걱정했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을 합니다. 남편은 '지도자는 국민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지도자들이 국민이 요구하는 바를 잘 듣고 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민들은 현명합니다. 지금의 어려운 상황도 국민들이 바로잡을 것으로 믿습니다."

―국민들에게 김 전 대통령은 어떤 분으로 기억되길 바라십니까.

"남편이 일생 추구했던 것은 분명했습니다.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남북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힘쓴 분입니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이것을 걱정했습니다. 저는 남편이 민주주의와 남북의 화해 협력, 국민의 행복을 위해 살아온 분으로 기억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남편이 이 나라를 위해서, 민주주의를 실천하기 위해서 일생을 바친 사람이란 걸 기억해주시고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데 노력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양심을 중요시해주셨으면 합니다. 거짓이 없는 삶이 되도록 노력해주시기 바랍니다."

―'인간 김대중'을 평가하신다면….

"독서를 좋아하고 정말 동등한 여성의 권리를 위해 노력한 사람입니다. 문패만 해도 남편이 단 뒤에 알게 된 것입니다. 남녀동등을 늘 먼저 실천했기 때문에 제가 '뭘 해 달라'고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이 여사와 결혼(1962년) 직후부터 집 대문에 '김대중 이희호'라고 나란히 적힌 문패를 걸었다. 이 여사는 자서전 '동행'에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며느리 문패를 단다는 것은 가히 혁명적인 발상이었다"고 회고했다.

―여사님께서는 자서전 '동행'에 '고난과 영광의 회전무대'라는 부제를 붙이셨습니다. 김 전 대통령과의 '동행'을 후회해본 적은 없으십니까.

"후회해본 적은 없습니다. 47년을 남편과 함께 살았습니다. 1973년 일본에서 납치돼 생사를 모를 때, 그리고 사형선고를 받고(1980년) 감옥에 계실 때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남편과 저는 이러한 고난은 비록 우리가 겪고 있지만 나라의 민주화를 위한 것이라 생각하고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저는 남편과 함께 고난의 시절을 이겨내고 영광의 시간을 함께 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특히 남편은 저와 가정을 위해 세삼하게 신경을 써주셨습니다. 가정의 화목을 실천한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성운동가로서 여성들에게 당부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아직은 여성이 장(長)으로서 있는 곳이 많지 않습니다. 여성 국회의원 수도 많지 않습니다. 예전부터 제가 선거운동을 해봤습니다만, 여성 유권자가 여성 후보를 잘 찍질 않아요. 여성이 적극적으로 주어진 권리를 행사해야 합니다. 능력이 있다면 여성 유권자들이 적극적으로 여성 후보에게 표를 행사했으면 좋겠습니다. 권리가 있더라도 행사하지 않는다면 그 권리는 사장되고 맙니다."

―양극화 심화 등으로 인해 국민들이 무척 어려워하고 있습니다.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아무리 어려운 처지에 있더라도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성경 말씀 남북관계에서도…"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대표단 환송 오찬에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왼쪽)이 이희호 여사에게 건배를 제의하자 이 여사가 화답하고 있다. 동아일보DB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대표단 환송 오찬에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왼쪽)이 이희호 여사에게 건배를 제의하자 이 여사가 화답하고 있다. 동아일보DB
―지난해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사건이 있었습니다. 남북관계가 풀리지 않고 있는데 어떻게 돌파구를 열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남북 정상이 만나서 대화로 풀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 정부 들어서는 대화가 중단된 상태입니다. 남아도는 쌀도 굶주리는 북한 주민들을 위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상회담을 해야만 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권에서도 대북특사를 보내야 한다는 의견이 많이 나옵니다만….

"특사 파견은 필요합니다. 특사를 보내서 남북 정상회담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정상들이 풀어야, 정상들이 합의를 해서 (남북 화해 협력을)실천에 옮기도록 해야 합니다."

―김 전 대통령께서 가장 애정을 가지고 노력하셨던 남북관계가 현 정부 들어 원만치 않다고 걱정하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이명박 대통령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이 대통령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성경에 있는 말씀을 실천하실 줄 압니다. 성경에는 사랑에 관해서 상세히 나와 있습니다. 성경 말씀(사랑)을 남북관계에서도 실천했으면 좋겠습니다."

―6·15 정상회담 10년째였던 2010년 4월 북 측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는 평양에서의 남북 공동학술토론회 개최와 이 여사의 참석을 제안했습니다. 당시엔 불발됐습니다만, 다시 초청이 온다면 방북 의사가 있으신지요.

"그 때 북 측에서 정식으로 초청이 왔습니다. 그러나 천안함, 연평도 사건, 핵 문제로 남북관계가 악화돼 방북할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북한의 초청에 대해 정부가 허락한다면 가보고 싶습니다. 2000년 (6·15 정상회담 때) 만났던 분들도 다시 만나보고 특히 남편의 국장(國葬) 때 조문특사단을 보내준 것에 대해 사의도 전하고 싶습니다. 제 방북이 남북화해와 관계회복에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가보고 싶습니다."

―북한 어린이들을 위해서도 뜨개질을 하고 계신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만.

"(제가 고문으로 있는) 재단법인 '사랑의 친구들' 회원들과 함께 3~4세 어린이용 모자를 짜고 있습니다. 원래 1만개를 북한에 전달할 계획으로 짠 것인데, 1만개는 이미 준비가 돼 있습니다만 보내질 못하고 있어요. 북한과의 관계가 좋질 않으니 전달이 안 되고 있는 겁니다. 제가 방북을 하게 되면 가지고 갈 생각도 있습니다."
이 여사는 뜨개질을 잘 한다. 김 전 대통령이 병상에 계실 때는 벙어리장갑과 양말을 떠 차가운 손과 발에 끼워주었다.

●"차기 대선 야권 단일 후보 아직 눈에 띄는 사람 없어… 신정아 TV에서 처음 본 사람"

―김 전 대통령은 생전 민주개혁세력의 단결, 통합을 강조하셨습니다. 야권 단일 후보는 어떤 사람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말할 수가 없습니다. 과연 이명박 대통령 후임은 (대선)시기가 임박해 누가 (각 진영의) 후보가 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것입니다. 야권 단일 후보는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사람이 돼야 하지만 아직은 (인물이)눈에 띄지 않습니다."

―차기 주한 미국대사로 내정된 성 김 미 국무부 북핵 6자회담 특사의 부친은 과거 '김대중 도쿄 피랍 사건'에 개입한 김재권 전 주일공사입니다. '동행'에는 김 전 공사가 당시 사건의 '일본 내 총지휘자'로 기록돼 있습니다만….

"한국 사람이 처음으로 한국대사에 오는 것에 기쁘게 생각합니다. 첫 한국계 미국인 대사가 되는 만큼 한미관계, 남북관계 진전에 많은 일들을 해주길 바랄 뿐입니다. 남편의 피랍 사건과 연관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그건 (성 김 내정자) 아버지와의 일이었습니다."

―신정아 씨가 자서전 등을 통해 '외할머니'가 노 전 대통령에게 자신을 소개한 연결고리라고 주장했을 때 그 '외할머니'가 이 여사란 얘기가 돌았는데요….

"저는 신정아란 사람을 만나본 일이 없어요. 그 사건(변양균 전 대통령실장과의 스캔들)이 터져서야 처음 신정아 씨를 TV에서 봤거든요. 제가 그 사람의 외할머니가 된다면 제게 딸이 있어야 할 텐데 저는 딸이 없어요. 또 제가 외할머니라고 찾아온 사람도 없고…(웃음). 그런 얘기가 대체 왜 나왔는지 모르겠어요."

―'동행'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김 전 대통령의 석방을 구명할 때 전 전 대통령이 '동네 복덕방 아저씨가 아주머니 대하듯 바지자락을 올리고 다리를 긁적이면서 편안히 얘기했다'고 기술돼 있는데요. 솔직히 화가 나진 않았습니까.

"당시 허화평 씨가 만나자고 먼저 연락이 와서 만남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 분(전두환)의 소탈함을 적은 것이고, 전 전 대통령이 다리를 오래 긁은 것도 아니었어요.(웃음)"

조수진기자 jin0619@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