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비 딕. 거대한 흰 고래의 이름입니다. 허만 멜빌이라는 미국 소설가가 쓴 동명 소설(1851년 작)에 등장하는 고래입니다. 국내에선 백경(白鯨)이라는 한자제목으로 더 많이 알려졌는데 그게 결국 '흰 고래'라는 소리입니다.
여기서 '흰 고래'는 최대 몸길이 4.5m인 돌고래를 닮은 고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몸길이가 15~20m나 되는 거대한 향유고래 중에서 아주 특별한 돌연변이 고래를 말합니다.
물론 세상에서 가장 큰 고래는 흰수염긴고래입니다. 몸길이가 25~30m나 나갑니다. 그렇지만 흰수염긴고래는 이빨이 없습니다. 공격성을 상징하는 이빨을 가진 동물 중에서 가장 큰 생명체는 향유고래입니다.
멜빌의 소설은 이를 토대로 고래잡이배, 즉 포경선을 공격하는 크고 사나운 고래 모비 딕을 창조해냈습니다. 물론 모비 딕이 완벽한 창작의 산물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포경선원들 사이에서는 포경선을 공격해 침몰시킨 동명의 실존고래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멜빌은 그 전설적 고래 이야기를 토대로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여기던 계몽주의에 일격을 가하는 현대적 묵시록을 빚어냈습니다.
이야기는 단순합니다. 광포한 고래 모비 딕에게 한쪽 다리를 잃은 에이허브 선장이 자신의 포경선 피쿼드호를 타고 바다로 나간 뒤 오로지 복수심에 불타 모비 딕을 쫓다가 자신은 물론 피쿼드 호까지 파멸에 이른다는 내용입니다.
내용만 놓고 보면 드라큘라나 프랑켄슈타인 같은 초자연적 존재를 그린 영국 고딕소설을 닮았습니다.
하지만 멜빌은 이 같은 모험담의 틀 안에 거친 자연에 대한 숨 막힐 듯 사실적 묘사와 인생과 우주의 비의(秘意)를 담은 수많은 상징을 함께 담아냈습니다. 그리하여 19세기 미국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작품을 빚어냈으며 이후 조셉 콘라드, 어니스트 헤밍웨이, 코맥 매카시로 이어지는 묵시록과 잠언의 풍모를 함께 갖춘 서사문학의 효시가 됐습니다.
뮤지컬 평론가인 조용신 씨가 제작한 창작뮤지컬 '모비 딕'은 바로 이 소설을 뮤지컬화한 것입니다. 그는 이를 음악연주자들이 직접 노래와 연기까지 맡는 '액터 뮤지션 뮤지컬'로 제작했습니다. 매우 참신한 발상입니다.
원작 소설은 눈처럼 하얗지만 동시에 세상의 모든 악의(惡意)가 결집된 존재로서 모비 딕을 언어로 포착해냅니다. 1956년 제작된 그레고리 펙 주연의 영화는 그 거대한 흰 고래를 영상을 통해 강렬히 시각화해냅니다. 그렇다면 이를 무대화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뮤지컬 \'모비 딕\'의 배우들은 춤과 노래, 연기는 물론 직접 악기 연주까지 맡는 \'액터 뮤지션 뮤지컬\'을 펼쳐보인다.
두산아트센터 제공 뮤지컬 '모비 딕'은 이를 청각적 묘사로 돌파합니다. 음악을 통해 이야기를 담아내는 뮤지컬이란 장르의 특징을 극대화하는 방식입니다. 뮤지컬에선 당연히 실제 고래는 물론 그 상징물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배우들이 직접 연주하는 관현악 사운드를 통해 모비 딕의 아우라를 담아낼 뿐입니다. 모비 딕이 피쿼드 호를 향해 돌진하는 절정의 순간, 배우 중 한명이 하얀 색 정장을 입고나와 콘트라베이스로 불협화음에 가까운 음악을 독주하는 상징적 무대 연출만 있을 뿐입니다.
무대 역시 악기 중심으로 구성됐습니다. 가운데 피아노를 놓고 그 위 공간을 모텔의 침대나 피쿼드 호의 갑판 내지 선실로 활용합니다. 그 주변 의자와 바닥에는 콘트라베이스, 첼로, 바이올린, 클라리넷, 섹스폰, 기타 등의 악기가 배치됩니다.
배우들은 필요할 때 이 악기로 음악과 음향까지 다 빚어내면서 각자가 맡은 배역을 같이 소화합니다. 깔끔하면서도 변화무쌍한 클래식 풍의 음악(정예경 작사, 작곡)도 뒷받침합니다.
극의 전반부를 이끄는 퀴퀘그 역의 바이올리니스트 이일근 씨와 이쉬마엘 역의 피아니스트 신지호 씨.
두산아트센터 제공 배우들만 연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악기들도 연기를 합니다. 첼로를 바닥에 고정시키는 길쭉한 엔드 핀은 모비 딕에 물어 뜯겨 흰 고래뼈로 대신한 에이허브 선장의 한쪽 발목이 되고, 바이올린 활은 작살로, 클라리넷은 망원경으로 변신합니다.
저는 이런 점에서 이 뮤지컬을 '액터-뮤지션 뮤지컬'이라고 부르기 보다는 악기 중심의 '인스트루먼탈 뮤지컬'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뮤지컬은 거친 바다를 헤치며 고래를 잡는 포경선원들의 모험 보다는 인물들 간의 내면적 교감과 갈등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는 두 개의 축을 중심으로 십자가처럼 교차합니다.
첫 번째 축은 도시생활에 환멸을 느껴 바다로 나온 이쉬마엘(신지호)과 남태평양 섬 원주민 출신의 이교도 작살잡이 퀴퀘그(이일근) 간에 이뤄지는 교감의 축입니다. 두 번째 축은 오뉴월 서리와 같은 차가운 복수심에 사로잡힌 에이허브 선장(황건)와 따뜻한 합리주의자인 일등항해사 스타벅(이승현·유성재) 사이의 갈등의 축입니다.
사실 이쉬마엘과 퀴퀘그는 정신적 쌍둥이입니다. 퀴케그가 타고난 이교도라면 이쉬마엘은 선택적 이교도입니다. 이는 이쉬마엘이라는 이름에 이미 담겨있습니다.
히브리 성경(구약)에서 이쉬마엘은 아브라함의 서장자로 적자인 이삭이 태어나면서 어머니 하갈과 함께 광야로 쫓겨나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이슬람에선 그가 바로 진짜 하나님의 선물이며 마호메트의 선조가 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포경선 '피쿼드' 호의 유일한 생존자로 해설자 역할을 수행하는 이쉬마엘(신지호)과 남태평양 섬 원주민 출신의 이교도 작살잡이 퀴퀘그(이일근). 두 사람은 '방황하는 영혼'이라는 점에서 영혼의 쌍둥이다. 피아니스트인 신지호씨와 바이올리니스트인 이일근 씨는 이런 영혼의 교감을 이중주로 연주해낸다. 두산아트센터 제공 에이허브와 스타벅 역시 한때는 그런 정신적 쌍둥이였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모비 딕에게 다리를 물어뜯긴 에이허브는 마치 광경병(狂鯨病)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광기어린 복수심에 불탑니다.
반면 스타벅은 "용기는 감정이 아니라 도구"라고 믿은 합리주의자이며 뭐든 지나치면 불운을 부른다고 믿는 중용의 미덕을 갖춘 리더입니다. 에이허브가 가슴에 불을 지르는 위스키를 닮았다면 스타벅은 정신을 맑게 해주는 커피(커피체인 스타벅스의 상호가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것을 상기해주세요^^)와 같습니다.
비록 미국 소설을 원작으로 했지만 모처럼 뛰어난 창작뮤지컬이 탄생했습니다. 그것을 공연예술에 맞게 풀어낼 줄 아는 연극적 상상력, 보통 춤 노래 연기로만 파악되는 뮤지컬의 제4의 요소로서 연주까지 끌어들인 스타일의 혁신 그리고 원작 속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재구성한 점까지.
하지만 결정적 약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이쉬마엘과 퀴퀘그의 이중주, 에이허브와 스타벅의 이중주는 있지만 그 네 명이 교차하면서 빚어내는 사중주가 빠져있는 점입니다. 그것은 비단 음악적 요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네 명의 캐틱터를 통해 이 작품을 관통하는 진정한 주제의식과 연결돼있습니다.
이 작품에 대한 비평은 주로 에이허브와 모디 딕의 대결로 압축돼 왔습니다. 그것은 선과 악, 문명과 자연의 선명한 이분법적 대결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런 시각을 쫓을 때 에이허브는 고전 그리스 비극의 영웅처럼 그려집니다.
그렇지만 저는 모비 딕과 에이허브 모두 계몽주의와 그 산물로서 휴머니즘(인간중심주의)이 빚어낸 비극의 산물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모비 딕은 과학기술과 계몽주의로 무장한 인간이 정복과 지배의 대상으로 전락시킨 자연의 응징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문명 또는 문화가 이해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 없는 '미친 자연'입니다. 그것은 또한 자연과 문명 사이에 존재하는 거대한 심연을 상징하는 존재입니다.
에이허브는 문명인들에게 금기시되는 그 심연의 실체를 온몸으로 체험하고 그에 감염된 존재입니다. '미친 자연'의 심연에 빠진 사람 역시 '미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그는 이제 더 이상 스타벅과 같은 합리주의자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 역시 인간의 문명사회에서 떨어져 나온 이단아로서 이쉬마엘이나 퀴퀘그 처럼 '방황하는 영혼'입니다. 아니 그 이상입니다. 그는 미친 존재, 저주받은 존재로서 그와 유일한 등가물은 그가 그토록 저주하는 모비 딕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뜻한 합리주의자인 일등항해사 스타벅(이승현)과 차가운 복수심에 사로잡힌 에이허브 선장(황건)의 대립은 피쿼드 호 내부에 조점을 맞춘 이 뮤지컬의 주된 갈등요소다. 두산아트센터 제공 흥미롭게도 뮤지컬은 인간과 자연(고래)의 대결이 아니라 피쿼드 호 내부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놀랍게도 스타벅-이쉬마엘-퀴퀘크-에이허브로 이어지는 탈계몽주의 인간의 프리즘을 펼쳐놓습니다.
문명세계의 논리에 충실한 스타벅이 이성(로고스)를 대표한다면 문명보다 자연을 동경하는 이쉬마엘은 합리주의에서 벗어나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윤리적 고민(에토스)을 지닌 존재입니다.
본래 자연에서 문명세계로 편입된 퀴퀘크는 미치기 전 자연의 지혜를 간직한 신화적(뮈토스) 존재입니다. 그리고 에이허브는 그 모두를 뛰어넘어 죽음본능(타나토스)이라는 원초적 본능을 향해 질주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뮤지컬에는 이런 심층적 구조에 대한 심층적 성창이 빠져있습니다. 그래서 에이허브에 대한 고전적 영웅담도 아니고 인간의 환경파괴에 대한 비판도 아닌 한 청춘(이쉬마엘)의 허망한 로망으로만 끝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4명의 캐릭터 별 특징에 맞춰 테마곡을 재구성하고 이런 캐릭터 별 특징을 살린 이중창(이중주) 또는 사중창(사중주)을 새롭게 가미한다면 세계 어느 무대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는 작품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8월 20일까지 서울 연지동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 111. 4만 원. 02-708-500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