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3.5km가량 떨어진 미델그룬덴 풍력발전 단지. 이곳에 설치된 20개의 풍력발전기는 24시간 쉴 새 없이 돌아가며 생산한 전기를 코펜하겐에 살고 있는 4만 가구에 공급한다. 바닷바람으로 전기를 만드는, 말 그대로 ‘바람농장(Wind Farm)’인 셈이다. 1990년대 중반 풍력발전단지가 들어설 당시에는 자연경관 훼손을 우려하는 환경단체들의 반발이 거셌다. 하지만 지역주민들이 협동조합을 구성한 뒤 전면에 나서면서 환경단체들의 반대는 꺾였다. 》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 인근 해안가에 위치한 미델그룬덴 풍력발전단지. 덴마크는 일부 환경단체의 반대에도 풍력발전을 미래 에너지원으로 삼는다는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내 세계 1위의 풍력발전 국가로 발돋움했다. 덴마크 풍력발전협회 제공
주민들이 앞장선 것은 풍력발전을 미래 에너지원으로 삼는다는 ‘국민적인 합의’가 사전에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합의에는 과학기술과 관련한 갈등 예방 활동을 펴고 있는 ‘덴마크 기술이사회’의 기여가 컸다. 기술이사회는 미델그룬덴 사업이 본격화되기 전부터 일반인과 전문가가 참여하는 기술영향 평가를 통해 풍력발전 등 녹색기술 도입에 따른 갈등 가능성을 점검하고 정부가 대책을 마련하도록 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 현재 덴마크는 전국에 5000여 개의 풍력발전기를 갖춘 세계 제1의 풍력발전국가로 입지를 다지고 있다. 풍력발전은 또 관련 설비 수출과 함께 4만 개 이상의 일자리를 만들어내면서 덴마크 경제의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덴마크는 풍력발전을 비롯한 재생에너지 기술은 물론 친환경 및 바이오 기술 등 미래형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불리는 ‘녹색산업’에서 세계 시장을 이끌고 있다. 선진국들이 미래의 경제성장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저마다 매년 수조 원씩을 쏟아 붓고 있는 가운데 인구 500만 명의 덴마크가 ‘녹색리더’가 될 수 있었던 것은 1980년대부터 정부가 앞장서 착실한 준비를 해왔기 때문이다. 특히 덴마크는 기술 정책 수립 단계에서부터 다양한 전문가와 일반인을 참여시켜 기술도입으로 나타날 수 있는 갈등을 예방하면서 경제발전과 환경보호 등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과학기술정책, 시민참여로 갈등 예방
대부분의 국가는 과학기술 정책을 별다른 여론 수렴 없이 관료와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있다. 과학기술 정책의 초점이 경제발전에 맞춰져 있는 탓이다. 상당수의 국가에서 정부가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부어 특정기술을 지원한 뒤 사회갈등으로 번지는 사례가 적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생명윤리 논란을 불러온 줄기세포 기술이나 각종 에너지산업은 물론 최근 화장품이나 약품에 포함된 나노입자가 토양에 스며들어 독성을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로 유럽에서 규제를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난 나노기술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하지만 덴마크는 기술이사회를 통해 과학기술 정책 수립에 일반인과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키고 있다. 1986년 의회 소속 기구로 처음 설립돼 1995년 독립기구로 승격된 기술이사회의 가장 큰 역할은 첨단기술이 덴마크 사회에 미칠 영향을 분석하는 ‘기술영향평가’다. 기술이사회는 전체 과정을 진행할 뿐 실제 평가절차는 대부분 민간 전문가와 일반인들이 주도한다.
대표적인 기술영향평가 방식은 민간 전문가와 일반인이 함께 진행하는 ‘합의회의(Consensus Conference)’. 합의회의는 먼저 기술이사회가 시민 패널을 선발한 뒤 논란이 되는 과학기술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시민 패널들은 10여 차례 회의를 거쳐 이 기술의 부작용과 생활에 미칠 영향에 대한 질문을 작성한다. 이어 전문가들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면 시민 패널은 다시 합의회의를 통해 해당 기술에 대한 정부 지원이나 규제의 필요성 또는 부작용을 막기 위한 대책에 대한 의견을 결정해 발표한다.
합의회의 결과는 의회에 보고되고, 과학기술 정책에 반영된다. 기술이사회는 또 합의회의 결과에 따라 실제로 기술을 도입했을 때 나타날 문제점을 실험하는 ‘시나리오 워크숍’ 등을 통해 전문가는 물론 관련 사업계의 의견도 함께 의회에 전달한다.
○ 저출산 등 사회문제로 갈등 예방 확대
과학기술에 대한 영향평가에 일반인을 참여시키는 제도는 덴마크가 축산농가의 항생제 사용 제한이나 유전자변형식품(GMO) 등 민감한 기술규제를 큰 갈등 없이 도입하는 원동력이 됐다.
특히 이 제도는 기술 규제뿐만 아니라 성장 가능성이 큰 과학기술에 대한 지원을 이끌어내는 데도 도움이 되고 있다는 평가다. 기술이사회가 영향평가에 나서는 기술들은 의회나 정부는 물론 학자와 일반인 누구나 제안할 수 있다. 기술이사회에 접수되는 안건은 매년 150건 이상에 이른다.
이 과정을 통해 아직 상용화되지 않은 첨단기술들에 대한 영향평가가 이뤄지면서 정부와 의회가 미리 첨단기술의 성장 가능성과 사회에 미칠 영향을 분석하고 집중 육성할 기술을 선별하는 데도 효과적이라는 게 기술이사회의 설명이다.
하네 세베린센 기술이사회 부의장은 “시민 참여를 통한 기술영향평가는 과학기술로 발생할 수 있는 갈등을 예방하는 데 큰 효과가 있지만 전문가들의 기술제안 창구로서 성장성 높은 기술에 대한 정부의 관심을 이끌어내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최근 기술이사회는 과학기술을 넘어서 인터넷 정보보호와 교통체계, 저출산과 비만 등 각종 사회문제로도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이민정책 등 심각한 갈등을 불러올 수 있는 사회문제들도 갈등 예방 차원에서 기술을 통한 보완대책을 준비해 보자는 취지다. 덴마크가 지난해부터 청량음료에 일종의 비만세인 ‘소다세’를 매기는 등 강력한 비만대책에 나선 것도 2009년 기술이사회를 거쳤다. 고속도로까지 자전거도로가 설치된 자전거천국 덴마크의 자전거전용 신호등 도입 등도 마찬가지다.
안데르스 자코비 기술이사회 프로젝트 매니저는 “기술이사회가 다루는 기술은 과학기술뿐만 아니라 의료나 정보, 교통 등을 모두 포함한다”며 “최근에는 시민들의 관심이 높은 사회문제들이 갈등 예방 차원에서 다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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