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권재현의 트랜스크리틱]게릴라와 게이의 슬픈 왈츠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3월 4일 12시 36분


거미여인의 키스 공연 컨셉사진.
거미여인의 키스 공연 컨셉사진.

'거미여인의 키스'는 동성애자(게이)의 슬픔을 다룬 연극이다?

연극 연작 기획 '무대가 좋다'의 일곱 번째 작품으로 공연 중인 이 연극을 보면서 이런 통념에 강한 의문이 들었습니다.

연극은 군부독재가 한창이던 1970년대 남미 아르헨티나의 감옥이 배경입니다. 죄수는 둘. 한 명은 게릴라 반군으로 붙잡힌 정치범 발렌틴(최재웅), 다른 한명은 동성애자인 몰리나(정성화).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않는 두 죄수가 펼치는 애증의 드라마가 극의 뼈대입니다.

1970년대 아르헨티나 감옥을 무대로 게릴라와 게이의 슬픈 사랑을 그린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 왼쪽부터 게릴라 발렌틴 역의 최재웅 씨와 게이 몰리나 역의 정성화 씨. 악어컴퍼니 제공
1970년대 아르헨티나 감옥을 무대로 게릴라와 게이의 슬픈 사랑을 그린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 왼쪽부터 게릴라 발렌틴 역의 최재웅 씨와 게이 몰리나 역의 정성화 씨. 악어컴퍼니 제공

원래 이 작품은 마누엘 푸익이 1976년 발표한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합니다. 2명의 죄수가 등장하는 2인극이란 점에서 1974년 발표된 남아공 극작가 아돌 푸가드의 연극 '아일랜드'를 닮았습니다.

두 작품은 남반구에 위치한 두 대륙의 1970년대 어두운 역사를 고발하는 정치극이라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전자가 남아메리카 대륙 최남단 아르헨티나 군부독재(훈타)의 추악함을 폭로한다면 후자는 아프리카 최남단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저항 정신을 북돋은 작품입니다. 이로 인해 발표된 직후 해당국가에서 불온작품으로 낙인이 찍힌 작품이기도 합니다.

남아공 감옥을 무대로 한 2인극 "아일랜드' 2009년 공연. 왼쪽부터 조정석, 양준모 씨
남아공 감옥을 무대로 한 2인극 "아일랜드' 2009년 공연. 왼쪽부터 조정석, 양준모 씨

재밌는 점은 '아일랜드'에선 두 죄수가 함께 연극공연을 준비한다면 '거미여인의 키스'에선 몰리나가 발렌틴에게 들려주는 에로틱 스릴러 영화가 극을 끌고 가는 주요 동력이 된다는 점입니다.

'아일랜드'에 등장하는 연극은 국가권력에 저항하는 오이디푸스의 딸을 주인공으로 한 그리스 비극 '안티고네'입니다. '거미여인의 키스'에 등장하는 영화는 '캣 피플'로 보입니다. 제 기억 속 영화는 나스타샤 킨스키 주연의 1982년 작인데 자료를 찾아봤더니 1942년에 제작된 B급영화가 원작이더군요.

나스타샤 킨스키가 주연한 영화 ‘캣 피플’의 DVD 재킷 사진
나스타샤 킨스키가 주연한 영화 ‘캣 피플’의 DVD 재킷 사진
'캣 피플'은 인간과 사랑을 나누면 야생 표범으로 변해 사람을 죽이는 표범인간의 치정극(癡情劇)입니다. '거미여인의 키스'에서 몰리나는 자기가 동네영화관에서 본 이 영화의 줄거리를 다섯 번에 나눠서 들려줍니다. 물론 자기 멋대로의 상상을 가미했기 때문에 부정확한 부분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영화 속 여주인공이 트란실바니아(루마니아 령) 출신이라고 말하는데 실제론 세르비아(옛 유고 령) 출신입니다. 작가가 일부러 '드라큘라'의 내용과 뒤섞어 실재 영화인지 몰리나의 상상 속 영화인지 헷갈리도록 한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거미여인의 키스'는 전통 정치극이라 할 수 있는 아일랜드와 차별화된 서사를 펼칩니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선정적 B급영화를 읊조리는 게이는 전통적 정치담론이라면 외면 받아 마땅할 '천박한 존재'입니다.

연극에서 민중혁명을 꿈꾸는 발렌틴이 가장 밑바닥 존재인 몰리나를 경멸하는 것도 그 연장선상에 존재합니다. 게다가 몰리나는 교도소장이 고문에도 조직의 비밀을 발설하지 않는 발렌틴에게 접근해 정보를 캐오도록 잠입시킨 끄나풀입니다.

그렇게 극과 극의 존재가 만나 스파크를 빚어내고 그것이 파멸이 아니라 뜨거운 인간애로 꽃피는 것이 이 작품의 진짜 매력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이 작품은 '게이와 게릴라의 그랑 파드되'라고 부를만합니다. 이지나 씨가 연출한 이번 작품을 보면서 진정 아쉬웠던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에선 게이만 보이고 게릴라가 보이지 않더라는 점입니다.

이 연극은 게이 연극이 결코 아닙니다. 게이와 게릴라의 연극입니다. 여기서 게이는 사랑을, 게릴라는 혁명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혁명의 분노와 열정은 오히려 희화화되고 애틋한 사랑만 부각됩니다.

그러다 보니 양자의 상호작용은 간과되고 게이의 사랑의 승리만이 찬미됩니다. 그 결과 게릴라가 게이의 사랑에 감복해 금기를 넘어서는 것도 게이가 게릴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도 모두 사랑 때문이라는 평범한 멜로드라마로 귀착되고 맙니다.

전투적인 게릴라와 순종적인 게이가 서로를 이해하면서 혁명을 위한 혁명이 아니라 사랑을 위한 혁명을 꿈꾸게 되는 두 사람.
전투적인 게릴라와 순종적인 게이가 서로를 이해하면서 혁명을 위한 혁명이 아니라 사랑을 위한 혁명을 꿈꾸게 되는 두 사람.

1970년대 게릴라나 게이는 모두 기존질서를 어지럽히는 '불온한 존재'였습니다. 연극의 원작소설은 분명 이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게릴라를 통해선 당시 익숙한 정치적 자유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작가는 한발 더 나아가 그 자유가 보편성을 지향한다면 사회적 소수자로서 게이의 자유까지 포괄해야함을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작품의 급진성은 그렇게 주류인 게릴라의 이념을 넘어 비주류인 게이의 현실을 꿰뚫는 데서 비롯합니다.

연극은 이런 역사적 맥락을 간과하고 이젠 익숙한 게이의 휴먼스토리에만 집중합니다. 이빨 빠진 게릴라는 때론 시대착오적 존재로 희화화되거나 게이의 사랑이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백마 탄 왕자'처럼 멋지게만 그려집니다.

하지만 이런 연출이야말로 시대착오적입니다. 지금은 오히려 게이가 주류이고 게릴라가 비주류인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게이를 앞세우고 게릴라를 뒷전에 세워버리면 원작의 파격적 주제의식도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1970년대 이 작품을 봤더라면 정글의 땀 냄새와 싸구려 향수 냄새가 뒤섞여 관객을 울렁거리게 만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체 게바라가 패션상품이 되어버린 우리 시대의 연극은 박제가 되어버린 게릴라의 포르말린 냄새에 고급스러운 이미지로 재탄생한 게이의 고급향수 냄새만 풍기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 연극을 보면서 40년 전에 느꼈을 그런 전율을 느낄 수 있을까요?

이 작품에서 게이와 게릴라의 균형이 왜 중요한지를 다른 방식으로 설명 드려 보겠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는 사람들이 세상의 질서에 저항하는 방식을 크게 둘로 분류했습니다. 하나는 세상이 정한 규범을 대놓고 무시하는 가학적 방식(사디즘)이고 다른 하나는 철저한 복종을 통해 오히려 규범을 우스꽝스럽게 만들어 조롱하는 피학적 방식(마조히즘)입니다.

연극 속 게릴라 발렌틴은 군부정권의 독재에 온몸으로 저항하는 적극적 반항아입니다. 가족과 사랑하는 연인을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군부정권을 끝장내고 말리라는 그는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겠다는 지사(志士)의 풍모를 지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발렌틴은 부도적한 세상에 맞서 싸우는 사디즘의 전사입니다.

마르크시즘으로 무장한 엘리트 지식인 출신의 게릴라로 분한 최재웅 씨.
마르크시즘으로 무장한 엘리트 지식인 출신의 게릴라로 분한 최재웅 씨.

반면 게이 몰리나는 동성애자를 혐오하는 세상의 편견을 못 견뎌 하면서도 그것을 안으로만 삭히는 소극적 반항아입니다. 발렌틴을 사랑하게 된 것도 교도소장의 부당한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것입니다.

감옥에서 풀려난 몰리나가 은밀히 발렌틴을 도울 때조차 모범적 시민의 본분을 잊지 않습니다. 심지어 발렌틴이 부탁한 접선이 들통 날 위기에 처했을 때조차도 그는 경찰의 총에 맞아죽기 보다는 게릴라의 총에 맞아죽는 길을 택합니다. 그런 점에서 몰리나는 마조히즘의 방식으로 세상과 대결하는 존재입니다.

이런 대조적 성향은 그들이 불러일으키는 웃음에서도 발견됩니다. 사디즘은 표면과 내면의 차질을 비집고 들어가는 풍자적 아이러니로 웃음을 빚어냅니다. 몰리나가 기억과 환상을 뒤섞은 영화 이야기를 들려줄 때마다 그 이야기에 내재된 반어적 상황을 냉소적으로 비트는 발렌틴의 웃음코드가 바로 그러합니다.

예를 들어 같은 게이가 아니라 '진짜 남자'를 좋아한다는 몰리나에게 발렌틴은 이렇게 응수합니다. "네가 나보다 훨씬 더 남자답잖아."

반대로 마조히즘은 상대의 불합리한 요구 앞에 철두철미한 복종을 펼침으로써 상대를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유머를 통해 웃음을 빚어냅니다. 남자에게 복종하고 굴종당하는 여자가 되지 말라는 발렌틴의 설교를 들은 몰리나는 이렇게 응수합니다.

"이건 여자만 아는 비밀인데, 네가 알아야 될 것 같아서 말해줄게. 잘 들어. 남자의 매력은 내가 그 남자에게 안겨있을 때 약간 두려움을 느끼게 해줄 수 있는 강함에서 시작 되는 거야."

자 이제 아시겠습니까. 이 연극은 적극적 저항가로서 게릴라(투쟁)와 소극적 저항가인 게이(사랑)의 두 날개로 날아갈 때 비로소 빛을 발하는 작품인 것입니다. 따라서 과거엔 더 소수자였던 게이(몰리나)에 초점을 맞춰다 하더라도 지금은 오히려 멸종위기에 처한 게릴라(발렌틴)에게 초점을 맞춰야 그 균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물론 관객의 관심은 온통 게이 역할을 하는 배우에게 쏟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동안 무대에서 코믹하거나 우직한 남성적 배역을 주로 소화해온 정성화 씨의 섬세한 게이 연기는 소름 끼칠 만큼 강렬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발렌틴은 비록 외모는 여성적이라도 정글에서 방금 튀어나온 것 같은 야수성을 물씬 풍길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최재웅 씨는 요즘 각광받는다는 '까도남'에 더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섬세한 몸짓과 목소리로 근육질 몸매의 게이 역을 소화한 배우 정성화 씨.
섬세한 몸짓과 목소리로 근육질 몸매의 게이 역을 소화한 배우 정성화 씨.

한 가지 더 아쉬운 것은 무대가 보여준 공간 감각이었습니다. 비좁은 감옥이라고 하기엔 무대가 너무 넓게 느껴졌습니다. 감옥이라기보다는 무슨 호텔방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폐쇄 공포증을 느낄 정도로 밀착된 공간이 조성될 때 원작의 팽팽한 긴장감이 밀도 있게 살아나지 않았을까요. 무대가 크더라도 조명효과를 좀더 입체적으로 살렸더라면 두 주인공의 내면연기가 좀더 살아날 수 있었을 텐데 조명이 너무 밋밋하게 쓰인 점도 아쉬웠습니다.

박은태 씨가 몰리나 역으로, 김승대 씨가 발렌틴 역으로 번갈아 출연. 3만~5만 원. 4월17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1관. 02-764-8760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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