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집중분석]드라마캐릭터열전⑫ 김집사가 막장드라마에 환장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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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월 10일 11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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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한 정장이 잘 어울리는, 하지만 그만큼 주방용 앞치마도 잘 어울리는 그는 아무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특정 시간만 되면 어김없이 텔레비전 앞에 앉는다. 마치 12시가 되면 궁 밖으로 뛰쳐나가는 신데렐라처럼.

그는 회장님을 돌아가시게 만든 원수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집사가 됐다. 그리고 그 복수의 교과서인 막장드라마 '욕망의 불똥'을 '본방사수'하며 기술과 방법을 터득하기 위해서이다.

많은 건물을 소유한 학원 원장 김갑수(김갑수 분)의 집에서 집사로 일하지만 사실 그의 목표는 원장의 비리를 밝혀내 회장님의 원한을 대신 풀고 복수를 하는 것에 있다. 그런 그에게 처절한 복수극을 표방한, 시트콤 속에서만 존재하는 막장드라마 '욕망의 불똥'은 최고의 교과서이다.
이미지출처=MBC \'몽땅 내 사랑\' 공식 홈페이지
이미지출처=MBC \'몽땅 내 사랑\' 공식 홈페이지

시트콤 '몽땅 내 사랑'의 김집사(정호빈)는 학원 원장에게 복수할 날을 고대하며 원장 집안의 모든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집사이다. 김 원장 때문에 사업이 부도나고 그 충격으로 사망한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와신상담하는 도련님 전태수(전태수)와 함께 김 원장에게 복수하기 위해 집사로 위장 취업한 중년의 노총각이 바로 김집사인 것이다.

'복수'와 '위장 취업'이란 단어에 너무 놀랄 필요는 없다. 그는 '귀요미'라는 어울리지 않는 아이디를 사용하면서 '욕망의 불똥' 게시판에 주인공을 죽이지 말라고 항의 글을 남길 정도로 드라마에 빠진 감성의 소유자일 뿐이다.

드라마를 보며 울고 웃는 것은 기본이다. 연말 연기대상 시상식에서 그가 애청하는 '욕망의 불똥' 주인공이 연기대상을 타지 못했다며 드라마 게시판에 항의 글을 남기는 그에게서 '복수'와 '위장 취업'의 음습한 기운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

그는 복수의 화신이 되기엔 너무 섬세한 남성이다. 듬직한 외모와 달리 드라마를 통해 복수의 방법을 학습하는 그는 자기 자신이 김 원장 때문에 세상을 떠난 회장님의 복수를 위해 사랑과 같은 사사로운 감정을 거부하는 순정파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학원 여선생들과의 스캔들이 끊이지 않는 전 실장에게 사랑에 빠지는 순간 회장님의 원한을 해소할 수 있는 복수는 물거품이 된다는 점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물론 그 순간에도 그는 자신이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복수를 위해 사랑을 거부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멀쩡한 외모로 심각하게 자아도취에 빠진 듯한 발언을 남발하는 그에게서 평범한 중년 남성의 모습을 찾기는 쉽지 않다.

때때로 그는 회장님의 복수를 위해 위장 취업한 것이면서도 복수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 김 원장에게 최선을 다 할 정도로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돈을 노리고 김 원장에게 접근한 박미선(박미선)의 계략을 드라마적 상상력으로 추론하면서 김 원장을 도와주고 우여곡절 끝에 김 원장의 집에 들어온 박미선에게 묘한 질투심을 느끼며 경계하는 모습에서 복수의 화신은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박미선 때문에 집안 살림을 도맡아 했던 자신의 자리가 흔들릴까 불안해하는 그는 영락없는 김 원장의 충복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드라마에서 시작하여 드라마로 끝나는 사유 체계를 가지고 있기에 가능한 상황이다.

자신이 처한 모든 상황을 그가 본 드라마의 상황에 비교해 해석하는 그는 종종 전 실장에게서 막장드라마를 그만 보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을 듣기도 한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그는 자기 예감만을 절대적으로 믿는다.

막장드라마 '광팬'답게 재산을 노리는 박미선의 계략을 눈치 채고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주시하면서 시시콜콜 김 원장에게 보고하던 그는 박미선의 미움을 사서 그녀의 음모에 빠지기도 한다. 적을 이기기 위해 적의 약점을 잡아야 한다며 그의 주변을 맴돌던 박미선 때문에 위기 상황에 빠지게 된 것이다.
이미지출처=MBC '몽땅 내 사랑' 공식 홈페이지
이미지출처=MBC '몽땅 내 사랑' 공식 홈페이지

그는 전 실장조차 모르고 있던 생일날 박미선이 끓여준 미역국에 마음을 빼앗긴다. 그리고 생활비 문제 때문에 고심하는 박미선에게 생활비를 절약해 비상금을 확보할 수 있는 비법을 알려준다. 그의 말을 모두 녹음한 박미선이 김 원장에게 김 집사가 비리를 저질렀다고 폭로하고 그로 인해 김 원장에게 내쫓기는 신세가 되고 만다.

전 실장의 걱정과 달리 김 집사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생활 습관에 젖어 있는 김 원장이 자신을 다시 불러들일 것이라 장담한다. 다만 '욕망의 불똥'을 '본방사수'하기 어려운 찜질방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김 원장 집으로의 복귀를 계획할 뿐이다.

그리고 그는 드라마에서 보았던 그대로, 김 원장의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한 작전을 펼친다. 김 원장이 들른 음식점과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불쌍한 표정을 짓는가 하면, 회식을 마치고 대리운전을 호출한 김 원장 앞에 대리기사로 나타나는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하지만 해고된 사람에게 뒤통수를 맞아 죽다 살아났다는 다른 학원 원장 이야기에 찜찜해하는 김 원장은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는 그에게서 공포심을 느끼면서 그를 더욱 멀리 하게 된다.

나이가 많아 갈 곳이 없다고 하소연 하는 방식으로 김 원장의 동정심을 유발하려던 계획이 헛수고로 돌아가면서 좌절하는 그의 얼굴은 주인에게 인정받지 못한 충복의 억울함 그 자체였다. 김 원장에게 잘 보이기 위한 그의 진지한 노력이 오히려 공포심을 유발하는 상황의 부조화가 웃음을 자아내면서 '귀요미 집사'의 면모가 도드라진다.

우여곡절 끝에 전 실장의 도움으로 김 원장의 집사로 복귀한 그는 자신을 음해한 박미선과 대립각을 세운다. 박미선이 자신의 딸 황금지(가인)를 전 실장과 만나게 하려고 접근하는 것을 목격하고 김 원장에게 만족하지 못한 박미선이 막장드라마에서처럼 젊은 전 실장을 유혹하는 것이라고 상상하면서 박미선을 경계한다.

상가번영회 장기자랑 대회 협찬금으로 기부한 돈을 상금으로 되찾기 위해 아이돌 그룹의 춤을 연습하는 김 원장의 행동을 해석하는 과정에서도 막장드라마 마니아로서의 그의 상상력은 유감없이 발휘된다.

김 원장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식구들과 함께 아이돌 그룹의 춤을 연습하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연예기획사를 차리려는 계획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곧이어 저간의 상황을 알게 된 뒤 전 실장에게 듀엣 결성을 제안하는 김 집사의 진지한 얼굴 표정은 연예계 스타를 동경하는 10대 청소년과 다를 바 없다.

김 집사가 발이 시리다는 이유로 황옥엽(조권)의 캐릭터 슬리퍼를 신는 것도 실은 앙증맞은 슬리퍼에 매료되었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도 그래서이다.

자신이 모시던 회장님의 억울한 죽음에 맞서 사사로운 감정을 거부한 채 복수를 꿈꾸는 그는 중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순수함을 간직한 남성이다. 특히 막장드라마 '광팬'으로서 아들 뻘의 황옥엽과 리모컨 쟁탈전을 벌이는가 하면, 김 원장이 좋아하는 것을 촉촉한 목소리로 읊조리는 장면에서 그의 순수함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자신을 골탕 먹이기 위해 영옥 할머니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여주며 주변에 소개팅 해줄 만한 사람이 없는지 물어보는 황옥엽의 계략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자신을 어필할 정도로 사랑을 갈구하는 감성적인 남성이기도 하다.

순수하고 감성적인 김 집사를 치열한 경쟁 구도 속에 내몰려 있는 우리 시대의 중년 남성을 대표하는 인물로 보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중년 남성들이 드라마에 빠지는 경향이 점점 늘어나는 상황에서 그를 그저 시트콤 속의 우스꽝스러운 인물이라고 치부하기도 어렵다.

'가장'의 의무와 책임에 사로잡혀 '돈 버는 기계'로 자의적으로, 혹은 타의적으로 전락한 중년 남성들이 불륜과 복수가 난무하는 드라마에 이목을 빼앗기는 경향 자체가 하나의 사건이라 할 만하다. 이러한 사회 변화의 단초를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김 집사가 아닐까 싶다.

깔끔한 정장과 그 위의 주방용 앞치마가 잘 어울리는, 그리고 중저음의 묵직한 목소리로 막장드라마 '본방사수'를 외치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 시대 중년 남성의 초상이 어렴풋이 보이지는 않을까.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드라마평론가 drama@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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