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를 통해 본 대한민국 근현대사]<17>예술문화 부흥의 중심지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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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1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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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국악 무용 연극… 문화황무지에 예술의 꽃 피우다

1920년 5월 4일 한국 최초의 실내 서양음악 연주회였던 야나기 가네코 독창회.
1920년 5월 4일 한국 최초의 실내 서양음악 연주회였던 야나기 가네코 독창회.
1920년 5월 4일 저녁 서울 종로 기독교청년회관 대강당에 인파가 몰려들었다. 일본의 여성 성악가 야나기 가네코(1892∼1984)의 독창회를 보러 온 사람들이었다. 이 공연은 한국 최초의 실내 서양음악 연주회였으며 동아일보가 주관한 첫 문화행사이기도 했다. 가네코는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으로 꼽혔고 일제의 광화문 철거에 반대 여론을 주도하기도 했던 미술평론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의 부인이었다.

낯선 서양음악회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뜨거웠다. 동아일보는 6일자에서 “사람들은 오후 6시 반부터 종로 널분 길로 와서 청년회 정문이 터지도록 꾸역꾸역 모혀들어 오후 7시가 되매 벌써 회장은 터지도록 만원이 되얏다”고 전했다. 당시 황무지에 가까웠던 조선의 서양음악계에 큰 자극을 준 사건이었다. 이어 동아일보는 1920년 6월 구한국군악대(舊韓國軍樂隊)의 후신인 경성악대(京城樂隊)가 재정난을 겪자 후원 음악회를 열기도 했다.

광복 이후 전쟁의 폐허와 가난 속에서 동아일보는 문화예술의 싹을 틔우기 위한 여러 사업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했다. 1961년 신예 음악가 발굴을 위한 ‘동아음악콩쿠르’가 처음 열렸다. 당시에는 연령 학력에 제한을 두지 않는 ‘대국민 오디션’이었다. 작곡(실내악), 성악,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등 5개 부문에서 58명이 참여해 기량을 뽐냈고, 피아노부의 신수정(서울대 명예교수)이 우수상을 받은 것을 비롯해 10명의 입상자를 배출했다. 올해 제50회로 반세기를 맞이한 동아음악콩쿠르는 대상 수상자로 이방희(11회·바이올린) 김금봉(12회·피아노) 임헌정(14회·작곡) 정준수(17회·바이올린) 송재광(18회·바이올린) 김대진(19회·피아노) 등을 배출하며 한국 음악계의 주축으로 자리 잡았다.

1997년에는 국내 최초의 국제음악콩쿠르인 ‘동아국제음악콩쿠르’가 피아노 부문에서 열렸다. 첫 회부터 21개국 43명의 피아니스트가 참가해 열띤 경연을 펼친 끝에 이스라엘의 아비람 라이케르트(현 서울대 음대 교수)를 우승자로 배출했다. 오늘날 ‘LG와 함께하는 서울국제음악콩쿠르’라는 이름으로 열리는 이 대회는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국제콩쿠르 중 하나로 매년 피아노, 바이올린, 성악 부문을 돌아가며 개최되고 있다. 2011년 4월에는 피아노 부문을 대상으로 제7회 대회가 열린다.

1961년 제1회 ‘동아음악콩쿠르’ 피아노 부문에 참가한 신수정 서울대 음대 명예교수가 연주하고 있다. 당시 신 교수는 우수상을 받았다.
1961년 제1회 ‘동아음악콩쿠르’ 피아노 부문에 참가한 신수정 서울대 음대 명예교수가 연주하고 있다. 당시 신 교수는 우수상을 받았다.
국악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1962년 명창명인대회, 1971년 판소리유파발표회, 1985년 동아국악콩쿠르도 잇따라 창설했다. 1984년 9월 20일 국악 전문가와 함께한 자리에서 김병관 당시 동아일보 전무는 동아국악콩쿠르 창설의 필요성을 이렇게 밝혔다.

“동아일보사는 그동안 문화주의 사시에 따라 각종 문화진흥에 진력해 왔습니다. …이제 우리 국민의 문화 수준도 이러한 문화축적을 바탕으로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따라서 우리 고유의 문화유산이 서양문물에 휩쓸려 설 땅이 없는 현실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1985년 4월 제1회 동아국악콩쿠르는 24명의 입상자를 배출했다. 사반세기를 맞은 이 대회는 왕기석 왕기철 박애리(이상 판소리) 김일륜 민의식(이상 가야금) 안성우 강은일(이상 해금) 등 800여 명의 국악인을 배출했다.

1964년 창설된 동아연극상은 한국 최초의 연극상이었다. 당시 동아일보가 30만 원의 상금을 내걸고 제1회 참가작을 공모한 일은 연극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 쌀 한 가마가 3000원 정도였다. 첫 회 대상은 동인제 극단의 선두주자였던 극단 실험극장의 ‘리어왕’이 차지했다. 이낙훈과 나옥주가 각각 남녀 주연상을 받았다. 역대 연출상을 수상한 김정옥 임영웅 오태석 윤호진 이상우 김석만 김광림 이윤택 김아라 등은 한국 연극의 주축이 됐다.

1984년 10월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이끄는 베를린 필 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첫 내한 연주를 펼쳤다.
1984년 10월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이끄는 베를린 필 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첫 내한 연주를 펼쳤다.
1964년 창설된 동아무용콩쿠르는 올해 40회를 맞았다. 세계의 국제무용콩쿠르 가운데 가장 역사가 오래된 불가리아 바르나 콩쿠르와 창설 연도가 같다. 첫해 김혜식 김영배 유학자 정주성 등의 입상자를 배출했고 발레니노 이원국 김용걸, 발레리나 김주원, 안무가 홍승엽 차진엽 등이 이 대회를 거쳐 성장했다. 6월 1일 동아무용콩쿠르 4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동아무용콩쿠르는 국내 무용콩쿠르의 생성과 제도화에 선구적 모델”이라고 평가했다.

동아일보가 세계적인 예술가와 공연 단체를 초청해 개최한 공연들도 국내 예술계에 크나큰 반향을 몰고 왔다. 1975년 4월 영국 로열발레단이 처음 내한해 서울 중구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사흘 동안 ‘라 바야데르’ 등 5편을 공연했다. 존 퓰러 단장 이하 111명이 모두 방한해 화제가 됐고, 입장료도 1만5000원(A석)으로 당시 최고가였지만 매진 사례를 기록했다.

1975년에는 세계 최고의 실내악단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이탈리아의 이무지치 실내악단이 처음으로 방한해 비발디의 ‘사계’ 등을 연주했다. 1979년에는 세계적인 안무가인 독일의 피나 바우슈가 동아일보 초청으로 처음 내한했다.

1990년 9월 동아일보 창간 70주년 기념사업으로 옛 소련의 9개 지역에서 열린 창극 ‘아리랑’ 순회공연. 현지에 사는 고려인들이 무대로 올라와 배우들과 함께 춤을 추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90년 9월 동아일보 창간 70주년 기념사업으로 옛 소련의 9개 지역에서 열린 창극 ‘아리랑’ 순회공연. 현지에 사는 고려인들이 무대로 올라와 배우들과 함께 춤을 추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84년에는 전설적인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이끄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역사적인 내한공연을 펼쳤다. 150명 단원을 전부 이끌고 온 카라얀은 10월 27, 29일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베토벤 교향곡 ‘운명’과 ‘전원’ 등을 공연했다. 서울 올림픽이 열린 1988년에는 세계 발레계의 신화로 불리는 러시아 볼쇼이 발레단이 첫 내한공연을 펼쳤다. 간판스타 니나 세미조로바, 마르크 페레토킨, 그리고 한국계인 스베틀라나 최가 펼치는 열정적인 춤에 관객들은 객석 매진으로 화답했다. 냉전시대가 막내리기 전 열린 이 공연은 광복 이후 최대의 ‘문화적 사건’으로 평가됐다.

동아일보는 1990년 9월 창간 70주년 기념사업으로 옛 소련의 9개 지역에서 창극 ‘아리랑’ 순회공연을 열었다. 이 공연은 국내외에서 고려인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사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고 이국땅에 흩어져 살던 동포들을 하나로 묶는 계기가 됐다. 연출을 맡아 70여 명의 단원을 이끌고 공연에 나섰던 손진책 극단 미추 대표는 2007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객석은 눈물바다였고 공연이 끝난 뒤 고국의 소식을 듣기 위해 동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회상했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 문예부흥 선구 일민 선생 “적자 나더라도 동아가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

1978년 내한한 영국 로열발레단원들과 인사하는 김상만 전 동아일보 회장(왼쪽).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78년 내한한 영국 로열발레단원들과 인사하는 김상만 전 동아일보 회장(왼쪽). 동아일보 자료 사진
일민(一民) 김상만 전 회장(1910∼1994)은 한국이 경제적 성장의 전환기에 휩싸여 있을 때 동아일보의 문화주의를 꽃 피우며 우리 사회의 문화적 성장을 이끌어낸 주역이었다. 그는 1961년 전무이사 겸 발행인에 취임한 뒤 문화사업을 통한 문화예술 육성에 앞장섰다. 1961년 동아음악콩쿠르의 창설을 시작으로 명인명창대회(1962년) 동아사진콘테스트(1963년) 동아무용콩쿠르 동아연극상(이상 1964년) 민속공예전(1967년)을 열었다.

당시 동아일보 내에서는 “적자가 나는 사업을 왜 하느냐”는 부정적인 시각도 있었지만 그는 “동아일보가 아니면 누가 하겠느냐”며 반대하는 사원들을 설득했다. 동아일보는 서울국제판화비엔날레(1970년) 동아미술제(1978년) 동아국악콩쿠르(1985년) 등을 잇달아 창설하며 언론을 통한 한국 사회의 문예 부흥에 선구적 역할을 했다.

세계적인 공연 단체를 초청해 우리 문화의 수준을 높이는 데도 일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61년 미국 줄리아드 현악 사중주단을 비롯해 독일 베를린 실내오케스트라(1962년) 영국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1964년) 이무지치 실내악단(1975년) 독일 슈투트가르트 실내관현악단(1976년) 등이 동아일보 초청으로 내한했다. 1979년 안무가 피나 바우슈 내한공연, 1984년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이끄는 독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공연 등 당대 문화지형도를 뒤흔든 대형 공연들도 그의 집요한 관심과 노력에 따라 성사됐다.

일민은 기록의 중요성을 인식해 가능한한 모든 것을 보관하려 노력했던 ‘수집광’이기도 했다. 동아일보 옛 사옥(현 일민미술관)과 수장고, 사무실 벽장, 책상 서랍에 꼼꼼히 모아놓았던 자료들은 현대문화사 관련 책을 엮어낼 정도로 방대했다. 그가 수집한 미술품은 일민문화재단을 세우는 밑거름이 됐고, 그가 보관해둔 신문인쇄기계와 활자를 바탕으로 동아일보는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에 국내 최초의 신문박물관을 설립할 수 있었다.

국제언론인협회(IPI)와 국제신문발행인협회(FIEJ) 활동에 참여하며 한국 언론의 위상을 높였고 한국 언론 자유 발전에 기여한 점을 평가받아 FIEJ의 ‘언론자유 금펜상’을 1975년 받기도 했던 일민은 생전 이렇게 말했다. “문화가 통일되면 정치적 통일이 앞당겨진다고 나는 믿는다. 문화가 약하면 무력통일을 해도 결국 지게 된다. 선친(인촌 김성수)께서는 단정(單政·단독 정부)에 헌신했으나 통일에까지 이르지 못했다. 문화가 우위에 서면 통일운동에 주도적으로 나설 수 있다고 믿는다.”

동아일보는 일민의 유지를 기리기 위해 1995년 일민예술상을 제정했고 2008년 명칭을 일민문화상으로 변경했다. 1996년 7월에는 일민문화재단을 설립해 예술가들의 창작 의욕을 고취하고 있다.

1926년 건립돼 1992년까지 66년간 사용된 동아일보 구 사옥은 1994년 6월부터 전시공간인 일민미술관으로 탈바꿈했다. 일민미술관은 리노베이션을 거쳐 2002년 2월 20일 현재의 모습으로 재개관했다. 갈색 타일과 최첨단 투명 아트리움(atrium)이 조화를 이룬 도심의 문화 명소로 사랑받고 있다.

동아일보사와 일민문화재단은 김 전 회장의 탄생 100주년을 맞은 올해 ‘일민의 문화-세계의 문화, 전통의 문화’전(1월 19일∼2월 28일)을 열어 평생을 언론과 문화진흥을 위해 헌신한 그의 뜻을 되새겼다.

민병선 기자 blued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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