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권재현의 트랜스크리틱]사랑한다면 아낌없이 빼앗아라, 기생충처럼

동아일보 입력 2010-09-30 17:31수정 2010-09-30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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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간의 어색한 침묵을 통해 극적 긴장감을 끌어내지만 성격 급하기로 유명한 경상도를 배경으로 번안한 탓에 어색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사진 제공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

과학저술가 매트 리들리는 '게놈'이라는 책에서 유전자의 관점에서 복잡한 인간과 정반대의 진화과정을 선택한 바이러스가 더 효율적 생명체일 수도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바이러스가 인간보다 유전정보를 더 오래 더 많이 보존할 수 있다는 점에서입니다. 일본 극작가/연출가인 히라타 오리자 원작을 번안한 연극 '이번 생은 감당하기 힘들어'(성기웅 번역 김한내 연출)에선 이런 기능적 관점을 넘어선 윤리적 관점에서 기생충이 인간보다 훌륭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옵니다.

인간은 수많은 생명체를 죽여 먹는 과정에서 기생충에 감염됩니다. 하지만 극소수를 제외하고 기생충은 어떤 생명체도 죽이지 않습니다. 숙주가 죽으면 자신도 살 수 없기 때문에 기생충이야말로 숙주와 공존을 택한 평화적 생명체로 진화해왔다는 것이지요. 오히려 기생충에 감염된 육식 동물들이야말로 그를 위해 다른 생명체를 살해한 살인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쓸모없는 인간을 향해 기생충이라고 욕하는 것은 지독히 인간중심적인 난센스일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무슨 불승(佛僧)의 잠꼬대 같은 소리냐고 하시겠지만 그것은 기생충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의 말입니다. 이 연극은 기생충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주인공입니다. 이색 기생충을 찾기 위해 체변 검사를 즐기는가 하면 직접 기생충을 먹기도 하고 애완용으로 키우기도 하는 괴짜들입니다. 관객들도 처음엔 연구원들 중에서 가장 괴짜를 남편(홍우진)으로 둔 가정주부 유리은(한성영)처럼 기겁을 하지만 연극이 끝날 무렵엔 기생충에 대한 또 다른 편견에서 자유로워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일본 극작가/연출가 히라타 오리자의 다른 과학연작들처럼 기생충학자들의 대학연구실을 배경으로 과학적 정보가 인문학적 성찰로 발효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사진 제공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

이 작품은 '과학하는 마음'이라는 히라타 오리자의 과학연작 3부작을 닮았으면서도 또 다릅니다. '과학하는 마음' 연작들은 영장류 연구나 분자생물학 뇌과학 등 21세기 최첨단 생명과학 연구 성과를 쉽게 풀어주면서 그것이 인간 삶에 가져다주는 통찰을 관객과 함께 음미하는 연극입니다. '이번 생은 감당하기 힘들어'가 다루는 기생충학은 생명과학이긴 해도 최첨단 학문은 아닙니다. 또 과학자들의 연구공간을 무대로 삼기는 했지만 10명 안팎의 인물이 나오는 '과학하는 마음'과 달리 다섯 명밖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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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이 적기 때문에 히라타 오리자 연극의 특징인 '동시다발적 대화'는 펼쳐지지 않습니다. 동시다발적 대화란 등장인물들이 무대 위에서 2, 3개 그룹으로 나뉘어 서로 다른 주제로 떠들어대는 것을 말합니다. 관객은 그 대화를 선택적으로 들을 수밖에 없지만 한 그룹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으면서 다른 쪽 그룹 이야기에도 슬쩍 슬쩍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무대 위 배우들도 자기들 대화에만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불쑥 다른 그룹의 대화에 끼어들기도 합니다.

이것은 러시아 문학비평가 미하일 바흐친이 찬미했던 다성주의(polyphony)를 연극적으로 체현한 방식입니다. 다성주의란 하나의 목소리만 들리는 단성주의(monophony)에 맞서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을 말합니다. 세계의 다원성과 총체성을 담아내기 위해선 예술작품에서도 단선적 시각이 아니라 다원적 시각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일상을 무대 위에 그대로 체현한 것이기도 합니다. 일상의 우리는 여러 가지 정보를 동시에 받아들이고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처리하는 멀티태스킹에 익숙한데 정작 연극 속 등장인물들은 늘 한가지에만 집중하니까요.^^

기생충학자들의 세계를 통해 세상의 상식을 뒤집어본 연극 '이번 생은 감당하기 힘들어'. 사진 제공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

동시다발적 대사는 히라타 연극에서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히라타 연극에선 사건이나 등장인물간의 갈등 자체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등장인물들 간의 미묘한 교감이나 신경전과 같은 요소를 녹여 넣어 극적 재미를 불어넣습니다. 물론 이런 긴장요소는 극이 끝날 때까지 해소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극적 갈등과 다릅니다. 다성적 화법은 이런 미묘한 긴장감을 조성하는 극적 장치로 활용됩니다. 끊임없이 주변의 다른 그룹을 의식하고 촉각을 세우고 있다가 수시로 끼어드는 상황묘사 자체가 그런 긴장감을 조성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동시다발적 대사가 빠진 '이번 생은 감당하기 힘들어'는 극적인 미묘한 긴장을 어떻게 표현할까요. 히라타 연극에서 그런 효과를 가져오는 또 다른 극적 장치가 있습니다. 바로 침묵입니다. 대화를 나누다가 문득 찾아드는 짧은 침묵의 순간. 상대가 이해 못한 내용을 새로 설명하려할 때나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불현듯 깨달았을 때 이를 수습하려 뜸을 들이는 순간의 휴지기(pause) 말입니다.

그의 연극 속 등장인물들은 이런 순간 말을 멈추고 상대방의 눈치를 보거나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기기 일쑤입니다. 타인에 대한 배려를 최우선시하는 일본사회에선 이런 무언의 '말줄임표'는 매우 사실적 호소력을 지닙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성격 급한 한국인들 눈에는 몹시 답답하게 비치기도 하지요. 일본을 무대로 한 원작을 낙동강 인근 경상도의 한 지방도시에서 벌어진 일로 번안한 '이번 생은 감당하기 힘들어'는 바로 이 지점에서 엇박자가 발생합니다. 충청도나 강원도를 배경으로 했다면 몰라도 성격 급하기로 소문 난 경상도 사람들이 대화 도중 눈치를 보면서 뜸을 들인다는 게 영 어색하게 비치기 때문입니다.^^

이런 형식적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사실을 통한 '상식 뒤집기'는 여느 작품 못지않은 힘을 발휘합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못지않게 '아낌없이 빼앗는 기생충' 역시 사랑의 또 다른 방식이 아니겠느냐는 역발상도 충분히 음미할만합니다. 상대와 진정한 공존을 꿈꾼다면 나 자신부터 상대에게 기생하는 법을 인정하고 배워야한다는 역설적 성찰이 차가운 실험실에서 꽃 피는 장면이 제법 장관입니다.

기생충을 연구하는 남편을 따라 서울에서 지방에 내려온 유리은(한선영)은 기생충도 싫고 지방생활도 싫다. 연구소 최고참인 문동환(백길성)은 그런 그녀의 기생충에 대한 편견을 깨뜨린다. 사진 제공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

생전 처음 들어보는 기생충들의 기기묘묘한 생존방식도 뜻밖에 다양한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사마귀의 뇌로 침투해 최종숙주인 물고기가 사는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하게 만든다는 네마토모프는 뱀파이어와 좀비라는 인간의 상상물이 이미 자연 안에 체현되고 있음을 일깨웁니다. 최종 숙주가 바다 속에 사는 고래여서 육상생물에서는 그 대형 성체를 볼 수 없다는 아니시카스는 '산해경'에나 등장할법한 신화적 존재로 느껴집니다. 암수성기를 한 몸에 지닌 자웅동체이면서도 감각기관과 운동기관이 다 떨어져나간 뒤에도 필사적으로 두 마리가 만나서 짝짓기를 하는 후타고무시는 '사랑의 전설'입니다.

기생충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모든 생명체를 존중해 살생을 저지르지 말라는 불교의 가르침이 새삼 절절하게 다가섭니다. 불교의 윤회론적 세계관을 반영하는 '이번 생은 감당하기 힘들어'라는 이 작품의 제목 역시 그런 성찰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겠지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생물체 중 하나인 기생충을 연구하는 연구원 이채욱(조재호)의 눈에 문득 가장 큰 생명체인 고래의 환영이 보이는 극적 설정 역시 그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유물론의 지배를 받는 현대과학의 현미경적 세계에서 유심론을 강조한 불교의 우주론을 만나는 '얼얼함'. 이 역시 극예술의 묘미 아니겠습니까.

2만 원. 10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정보소극장. 02-742-6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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