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강헌] 새로운 천년, 우리 노래의 정체성은? ①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9월 20일 14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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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팝의 세계적 유행 속에 우리가 잊고 있던 '한국 대중음악'
●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대중음악의 선각자들…신중현과 김민기

새로운 천년, 우리 음악의 정체성을 찾아야 한국 음악은 한단계 비약할 수 있다 (동아일보 DB)
새로운 천년, 우리 음악의 정체성을 찾아야 한국 음악은 한단계 비약할 수 있다 (동아일보 DB)

이몽룡이 서울로 올라가고 신관 사또가 남원으로 부임하는 '신연맞이' 대목을 중고제의 달인 김창룡이 '창극 춘향전'(1934년 녹음)에서 말 달리는 듯한 자진모리장단으로 호탕하게 부르는 것을 듣고 있노라면 1990년대 이후 선풍을 일으키며 우리 대중음악계를 장악하다시피 한 랩 음악과 우리 전통 음악의 내면적인 힘이 근원적인 유사성을 지니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판소리와 랩을 아우르는 이 힘의 정체는 단적으로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히 음악인류학적인 차원에서의 5음계 문화나 리듬의 법칙으로 설명될 수 없다. 그것은 귀족(양반) 문화와 백인 문화라는 정교하고 치밀한 지배 문화 체제가 은연중에 강요하는 보이지 않는 억압에 대한 본능적인 일탈이며 해방의 무의식이다. 그것은 21세기의 벽두에 발표한 젊은 소리꾼 김용우의 세 번째 민요집 '모개비'에서도 그 불굴의 진득함이 올올히 배어난다.

그러나 세상은 정형화된 신스팝의 음향이 빚어내는 매스 미디어의 거품으로 뒤덮여 있고 우리가 걸어가야 할 밤길의 별자리는 스모크에 갇혀 있다. 우리는, 적어도 음악의 영토에 관한 한 자신의 땅에서 유배된 자와 같다. 자, 또다시 핵심은 전통음악, 혹은 여전히 저개발의 상태에 놓여 있는 그것의 잠재적 가능성이다.

우리의 전통 음악은 박물관에 안치된 유물도 아니며 서양 음악 상륙기의 홍난파가 조롱했던 것처럼 원시적이며 무능한 음악 체계도 아니다. 합리적인 음향학의 토대에서 발전해온 서양음악(구체적으로는 백인음악)과는 다른 문화적 토양에서 형성되고 전개된 또 다른 음악일 뿐이다.

그러나 식민지의 역사는 우리의 전통적인 음악 문화가 새로이 근대적 형태로 이행하려는 숨통을 끊어 놓았고 해방 이후 등장한 미군정의 역사는 일방적인 서구 추종과 자국 문화의 경시 풍조를 방만하게 양성시켰다.

1995년말 그룹 넥스트를 결성한 신해철은 전통음악과 현대음악의 조화를 시도한다.(연합)
1995년말 그룹 넥스트를 결성한 신해철은 전통음악과 현대음악의 조화를 시도한다.(연합)

■ 대중음악 속에서의 전통음악

전통음악을 계승하고 보존해 온 많은 음악인들은 절망에 빠졌으며 엘리트 문화와 대중문화 전 영역에서 서구의, 특히 백인의 문화는 승승장구를 거듭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자국 전통음악 천시의 기류는 70년대 대학가의 민요부흥운동과 전문음악인들에 의한 사물놀이의 충격적인 재등장도 거스르지 못했다.

하지만 소극적인 '한'의 문화라고만 매도되어온 우리의 전통음악에 대한 관념이 보다 대중적으로 극복되는 계기가, 비록 모래밭의 바늘 수준이긴 하지만 문제의식을 가진 대중 음악가들에 의해 제기되는 흐름은 주목할 만하다.

1995년 말 본격적인 4인조 록 밴드의 틀을 완성한 넥스트(NEXT)의 콘서트를 통해 1990년대의 싱어송라이터 신해철과 기타리스트 김세황을 위시한 그의 동료들은 사물(四物)과 대고(大鼓), 그리고 여성 창(唱)과 동반하여 'Komerican Blues'와 'Requiem for Embryo'를 연주하는 충격적인 무대를 제공했다. 이들은 기타와 키보드 같은 서양의 선율악기들과 융합 속에서 전통음악에 내재해 있는 능동적인 폭발력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내며 주목을 받았다.

물론 대중음악에 우리의 전통음악을 접목시킨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멀리는 신중현과 김수철에서 가까이는 90년대 최대의 문제아 서태지와 아이들의 두 번째 앨범 속의 '하여가'와 강산에의 1996년 앨범에 이르기까지, 비록 단속적이긴 했지만 우리의 호흡을 복원하고 더욱 창조적인 질서를 만들어내려는 몸부림들이 이어졌다.

그러나 극히 드문 몇몇의 예를 제외하면 우리는 그저 신기한 눈으로 힐끗 쳐다보았을 뿐이다. 사물놀이가 유엔 총회장에서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펼쳐도 정작 국내에서의 반응은 무덤덤하다.

이탈리아로 유학을 가서 성공한 소프라노인 조수미의 음반에는 (과연 조수미가 그의 장기인 콜로라투라 레퍼토리를 제외한다면 세계 정상의 소프라노라고 부를 수 있을까?) '국가와 민족 차원의' 후원의 열광을 보여주면서도 세계에 떳떳이 내어 놓을 수 있는 우리의 독창적인 것에는 무심하다. 우리는 우리의 것이 가장 먼 이상한 땅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 마리의 제비가 봄을 불러 오진 않지만, 그렇다고 그 한 마리의 제비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밴드 넥스트의 리더 신해철을 위시하여 전통음악의 현대적 소통 가능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기본적으로 정당하다.

그것이 비명 한번 질러보지 못하고 잊힌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어이없는 시행착오로 끝난다고 하더라도 대중 음악가들의 이와 같은 본질적인 시도는 끈질기게 수행되고 축적되어야 한다. 제비 수천수만 마리가 오다보면 어느새 봄이 와 있는 것이다.

1993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도 중요한 음악적 실험의 하나였다.
1993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도 중요한 음악적 실험의 하나였다.

■ 자신의 땅에서 유배당한 불행한 음악 혼

지금/여기 음악의 주인이 서구의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발라드, 댄스뮤직, 로큰롤, 재즈에 이르는 중심적인 대중음악의 언어는 말할 것도 없고 소위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서양 음악의 시장도 만만찮다. 온전히 우리의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전통음악은 레코드 가게의 한 구석에서 초라하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거나 방송 프로그램에서도 사각 지대에 배치되는 푸대접을 감수해야 한다.

민요 및 판소리, 산조 같은 혁혁한 평민음악에서 시조와 제례악 같은 귀족음악에 이르는 우리의 전통음악이 20세기로 올바르게 이행하지 못한 결정적인 원인은 말할 것도 없이 전통 문화의 단절을 강제적으로 집행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정책에 있다. 그러나 과연 조선총독부에게만 모든 책임이 있을까?

우리가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사실 하나는 이 '밖과 위로부터의 강요'에 대해 적어도 1960년대까지는 여전히 우리의 전통 예술적 미학관이 끈질기게 저항해 왔다는 사실이다.

1960년 4.19 직전에 동아일보사가 조사한 최초의 음악취향 앙케이트 자료가 이를 반증해 준다. 이 자료에 의하면 당시 한국인의 음악 선호도 1위는 경음악(맘보나 차차차 탱고 같은 서구 댄스뮤직), 2위는 가요(일본 엔카의 영향 아래 형성된 트로트) 그리고 3위가 민요인데, 놀랍게도 이들 차이는 1~5%, 그야말로 오차 범위 이내의 박빙이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팽팽한 균형은 60년대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급속한 공업화 정책과 농촌 공동체 해체 과정에서 일거에 무너지고 만다. 요컨대 우리의 미학을 최종적으로 목 조른 주범은 식민지의 총독부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었다는 얘기다.
■ 해방 50년이 지나도 전통음악 관련 프로그램 하나 없어

우리의 어린이들은 초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서구 음계에 입각한 '학교 종이 땡땡땡'을 교육받는다(그나마도 이 노래는 바르토크의 '어린이를 위하여'의 선율 표절이다). 해방이 된 지 오십 년이 지났지만 초중등 음악교육 과정에 전통음악이 관련된 교육 프로그램 하나 제대로 자리잡지 못했다.

교육담당자들이 교육받지 못했으니 그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게다가 전통문화를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실행에 옮겼던 선구적인 교사들은 사상이 불온한 것으로 의심까지 받아야 했으니 본말이 전도되어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우리의 것에 대한 이와 같은 적대적인 무의식으로부터 우리가 벗어나지 못하는 한 우리 전통음악의 새로운 자리 매김은 존립할 수 없다. 하지만 이 말이 지금 당장 옛날의 음악으로 돌아가자는 것으로 이해되면 곤란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전통음악을 낳았던 사회적 조건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의 음률 정신을 되살린다는 것은 고고학적인 발굴이 아니라 전통과 현대라는 두 긴장의 축을 바탕으로 새로운 음악적 질서를 창출해내야 함을 의미한다.

이 작업이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 이상의 지속적인 실험과 연구의 연대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1973년 신중현의 첫 밴드 ‘애드 포’ 결성 당시(사진.왼쪽에서 두 번째).신중현의 첫 앨범은 고유한 전통음계와 박자가 현대적 대중음악과 크로스한 역사적 사건이라 볼 수 있다. (동아일보 DB)
1973년 신중현의 첫 밴드 ‘애드 포’ 결성 당시(사진.왼쪽에서 두 번째).신중현의 첫 앨범은 고유한 전통음계와 박자가 현대적 대중음악과 크로스한 역사적 사건이라 볼 수 있다. (동아일보 DB)

■ 대중음악의 선각자들… 신중현과 김민기

대중음악의 영역에서 '우리의 것은 무엇인가?'를 실천적으로 고민하고 가시적인 성과를 표명한 최초의 영예는 한국 록음악의 역사를 연 신중현에게 헌정되어야 한다(식민지시대의 미국 유학파 작곡가 안기영과 해방공간의 조선음악가동맹 작곡가들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는 1930년대 중반에 총독부의 문화정책과 일본 음반 산업의 이윤 동기가 합작하여 민요와 판소리를 교살했던 실질적인 하수인이었던 '유행가'라는 비극적인 역사를 되돌려놓기 위해 몸부림친 한국 대중음악의 진정한 영웅이다.

(②편에 이어집니다.)
강헌 /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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