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집중분석]드라마캐릭터열전④‘전설’이 되기엔 2% 부족한 전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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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9월 13일 12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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깻잎머리에 교복치마를 옷핀으로 묶고 육탄전을 벌이며 몰려다녔을 것 같은 여고동창생들. 이들이 모여 결성한 '컴백마돈나밴드'의 리더 전설희(김정은 분)는 '인형의 집'을 뛰쳐나온 21세기판 노라에 비유될 만큼 매력적인 여성이다.

전설희는 상류층 명문 법조가의 며느리라는 자리에 걸맞게 조신하면서도 우아하게 자신을 가꿔야 한다. 하지만 가슴 속에는 록 밴드 너바나(NIRVANA)의 보컬이자 기타리스트인 커트 코베인에 대한 열정과 음악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다.

만약 그녀가 보통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신데렐라에 불과했다면 음악을 포기하고 상류층의 삶에 만족했을 것이다. 하지만 전설희는 달랐다. 모두가 부러워할 정도로 행복해 보이는 삶을 버리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찾아 나선 것이다. 그녀에게서 21세기판 노라의 모습이 보이는 것도 그래서이다.

여자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형 로펌 사환으로 일하던 전설희는 혼전 임신을 통해 변호사이자 대형 로펌 후계자인 차지욱(김승수 분)과 결혼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편과의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

게다가 남들 앞에서는 우아한 모습으로 마치 친딸처럼 대하지만 집안에서는 "네까짓 게!"라며 모욕적인 언사를 쏟아내는 시어머니(차화연 분)의 멸시는 인간다운 삶에 대한 그녀의 자각을 자극했다.

또한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할 후손을 가져야 할 몸이라는 이유로 하나 밖에 없는 동생을 위한 골수 이식 수술을 반대하는 시어머니의 비인간적 태도에 환멸감을 느끼기도 했다. 오랜 고민 끝에 전설희는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으라고 강요하는 집에서 벗어날 생각으로 이혼을 결심한다.

대형 로펌의 공동 대표인 남편과 맞서 홀로 이혼 소송을 준비하는 와중에도 전설희는 여고동창생들과 그토록 오매불망하던 밴드를 결성하고 연습에 매진할 정도로 활동적인 여성이다. 법률 서적을 뒤적이는 모습, 다소 처연한 느낌의 심수봉과 달리 활기찬 모습으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며 '백만 송이 장미'를 열창하는 모습이 교차되는 장면에서 그녀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법정이라는 이성(理性)의 공간과 무대라는 감성(感性)의 공간을 넘나들며 새로운 인생을 향해 열정적인 걸음을 내딛는 그녀의 모습이 누군가의 시선에 갇혀 자신을 잃어버린 이 땅의 수많은 동년배 여성들의 가슴을 요동치게 만든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 동창들의 기억에 의해 재구성된 여고 시절은 어떠했을지 모르지만 이혼을 결심한 뒤부터 전설희는 정형화된 '영웅'의 이미지에 갇혀 버린다. 그리고 '전설'이 되지 못한다.



먼저 이혼 소송을 둘러싼 상황은 그녀가 왜 전설이 될 수 없는지 잘 보여준다. 이혼 소송에서 승소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로 남편의 불륜 장면이 담긴 동영상 자료를 확보하고도 법정에 제출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그녀는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진실을 왜곡하는 사람들과 똑같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한때나마 사랑해서 결혼했던 사람을 위하는 마음이든, 치졸한 그들과의 완벽한 분리를 원해서였건 간에 이혼 이후 삶에 대한 현실 감각을 찾기 어려운 그녀에게서 사람들의 입에 회자될 매력적인 전설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대책 없이 낭만적이기만 한 그녀는 결국 임신을 핑계로 사기 결혼을 하여 남편에게 정신적 피해를 입힌 여자라는 오명과 더불어 위자료 한 푼 없이 이혼당하는 신세가 된다. 이혼 소송에서 패배하고 홀로서기에 나선 전설희는 음악과 생계 문제에 비현실적으로 대처하면서 과연 그녀가 '왕십리 전설'이었을까 하는 의구심까지 품게 만든다.

아줌마 밴드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 편견에 맞서면서 음악 활동을 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생활고라는 현실적인 어려움까지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지만 그녀는 결코 주저함이 없다.

거침없이 밀고 나가는 추진력은 마치 여고 시절 '짱'이었던 그녀의 면모를 여실히 확인시켜주기 위한 것처럼 아줌마 밴드가 처한 어려움을 해소시킨다. 하지만 위기 해소 과정의 개연성이 떨어짐으로써 현실적으로 공감하기 어려운 부작용을 유발하고 말았다.

결코 주저하거나 좌절하지 않는 전설희에게서 매력적인 전설의 주인공이 아니라 주어진 역할에 충실한 정형화된 영웅의 모습이 보이는 것도 그래서이다.

'특정한 인물과 장소에 대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이야기'라는 의미의 전설은 현실에 기초하지 않으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후대로 전해지지 못한다. 전설은 초자연적인 존재나 신화적인 요소가 많지만 특정한 장소나 인물에 관련되면서 역사적인 사실로 이야기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전설희는 전설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밴드 동료들 사이의 불협화음을 정리하고 이혼 소송 당시 인연을 맺은 변호사 사무실에서 사무장으로 일을 하며 거침없이 불의에 맞서는 그녀의 행동은 마치 영웅처럼 미화되어 있다.

하지만 그녀가 겪는 모든 일들이, 그리고 그것에 대처하는 그녀의 행동은 현실적이지 않다. 결국 '나는 전설이다'라는 명제에 어울리지 않게 전설희가 매력적인 전설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 것은 그녀, 혹은 그녀를 둘러싼 상황들이 현실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전설이다'에는 전설희가 왜 음악을 좋아하고 아줌마밴드를 결성했는지는 설명할 수 있는 단서가 별로 없다. 그저 여상 재학 시절에 왕십리를 주름잡던 짱으로서 친구들과 록 밴드 '마돈나밴드'를 결성해 활동했던 것이 전부이다.

그래서 그녀에게 음악이 어떤 의미인지, 시장 재개발을 둘러싼 이권 분쟁 소송에 나선 그녀가 왜 입버릇처럼 인간다움을 외치는 것인지 그 이유가 궁금하다. 어쩌면 '밴드 데이' 무대에서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치고 권력과 자본의 음모가 아니라 없이 사는 사람들을 위해 발로 뛰면서 소송을 준비하는 전설희의 모습은 영웅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허상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커트 코베인을 좋아하는 그녀가 심수봉과 김창완, 그리고 김완선의 흘러간 노래를 부를 때 시청자들은 지나간 시간 속으로 스며들어 잠시나마 치열한 경쟁이 난무하는 현실에서 벗어나게 된다. 지나간 모든 것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또 남부러울 것 없이 풍족한 사람들이 더 많이 갖기 위해 없이 사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현실에 분개하는 전설희의 정의로움은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것일지 모른다. 경제적 양극화가 갈수록 심해지는 사회 현실에서 정의에 입각하여 진실을 외치는 것은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진실은 현실이 아닐 수도 있다. 전설희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후대로 전해지는 전설이 되지 못한 채 비현실적인 영웅의 정형성에 갇혀버린 이유는 그녀가 그토록 원하는 진실이 공정하지 못한 현실에서는 제대로 구명될 수 있는 이상(理想)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자아(自我)를 찾고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기 위해 집을 나선 21세기판 노라가 현실에 발을 붙이지 못한 채 수많은 대중이 원하는 정형화된 영웅에 머무르고 만 이유는….

그럼에도 전설희가 '신데렐라 콤플렉스'에서 벗어난 것만은 분명하다. 게다가 '컴백 마돈나밴드'의 노래 'We will comeback'에서의 '우리'가 진실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있지 않은가? 아쉽지만 그것에 만족해야 할 것 같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드라마평론가 drama@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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