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권재현의 트랜스크리틱] 뮤지컬 ‘키스 미 케이트’의 깜짝 선물 3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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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7월 29일 18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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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팬들에게 퀴즈 하나 내겠습니다. 미국 브로드웨이 뮤지컬 중에서 최초의 토니상 작품상 수상작이 뭘까요?

조지 거쉰이 작곡한 '포기와 베스'(1935년)를 떠올리시는 분 계시죠? 브로드웨이 황금시절의 대표하는 오스카 헤머스타인과 리처드 로저스의 '오클라호마!'(1943)나 '남태평양'(1949), '왕과 나'(1951) 중 하나를 떠올릴 분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그 영예는 현재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중인 '키스 미 케이트'의 몫입니다.

토니상은 1947년부터 시상했지만 연극과 뮤지컬 부문을 나눠서 시상한 것은 1949년 3회 때부터입니다. 바로 그 해 뮤지컬 부문 작품상과 대본상, 작사·작곡상, 의상상 등 5개 부문을 휩쓴 작품이 '키스 미 케이트'입니다.

1, 2회 때 작품상은 모두 연극에 돌아갔으므로 뮤지컬 작품으로는 명실상부한 첫 토니상 작품상 수상작입니다. 현재 공연중인 작품은 1999년 리바이벌 공연인데 역시 2000년 토니상 뮤지컬 부문 연출상, 남우주연상, 무대디자인상, 의상상, 리바이벌 작품상 등 5개 부문을 휩쓸었습니다.


'키스 미 케이트'를 접하고 발견한 첫 번째 깜짝 선물입니다. 이 뮤지컬은 그만큼 클래식 중의 클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고전 '말괄량이 길들이기'(The Taming of the Shrew)를 '극 중 극' 형식으로 담아낸 점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이탈리아 파도바를 무대로 부잣집 딸이지만 남자를 죽도록 싫어하는 카테리나가 페트루치오라는 마초 근성의 사내에게 휘어잡혀 사랑에 눈뜨게 된다는 로맨틱 코미디의 고전입니다. '키스 미 케이트'는 이 원작에 등장하는 페트루치오의 대사에서 따온 것으로 케이트는 카테리나의 애칭입니다.

부부 극작가였던 사무엘과 벨라 스페웩은 이 고전작품의 내용과 이를 뮤지컬로 무대화하는 현대 뮤지컬 극단 남녀배우들의 얽히고설킨 사랑싸움을 병치합니다. 카테리나 역(뮤지컬 배역의 이름은 미국식인 캐서린)을 맡은 여배우 릴리 바네시(최정원)와 그의 전남편으로 페트루치오 역과 연출을 맡은 프레드 그레함(남경주)의 밀고 당기는 신경전이 극 내용과 심리적 화학반응을 일으키도록 한 것입니다.



이런 극중극 형식의 차용은 두 가지 효과를 발휘합니다. 원작의 희극성을 두 배로 강화시키는 한편 현대 관객에게는 불편한 남존여비의 내용을 중화시켜줍니다.

예를 들어 극중 캐서린이 페트루치오에게 적나라한 욕을 퍼붓는 장면은 전남편 프레드의 애정행각에 분기탱천한 릴리의 화풀이와 겹쳐집니다. 프레드는 그런 전부인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공연을 무사히 끝내기 위해 페트루치오가 캐서린의 엉덩이를 매질하는 장면에서 실제 '무력동원'을 불사하죠.

극중극 밖에서는 프레드가 릴리를 붙잡지 못해 쩔쩔 매는 내용이 전개됩니다. 극중극에선 오늘날로 치면 열혈 페미니스트를 닮았던 캐서린이 남편에 대한 순종을 최대의 미덕으로 여기는 현모양처로 변신합니다.


하지만 캐서린을 연기하는 릴리는 우아한 상원의원 부인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박차고 프레드와의 자유분방한 사랑을 택합니다. 결국 릴리는 굴욕적인 캐서린 역으로 돌아옴으로써 오히려 스스로의 욕망에 충실한 자율적 여성이 되는 역설을 보여줍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두 번째 '깜짝 선물'을 발견했습니다. '키스 미 케이트'가 적용한 '극중극'의 형식을 셰익스피어가 이미 차용하고 있었다는 깨달음입니다.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본 수많은 사람들도 깜빡하는 것은 그 작품 자체가 이미 극중극의 형식으로 구성돼 있다는 것입니다.

이 작품의 서막은 어떤 영주가 술 취해 잠든 대장장이를 골려주기 위해 그를 성으로 데려가 자기 대신 영주로 대접하면서 그를 즐겁게 해주기 위한 여흥거리로서 유랑극단의 연극을 보여주는 겁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말괄량이 길들이기'가 바로 그 극중극의 이야기입니다.

셰익스피어 역시 그 이야기에 숨어있는 성적 불평등성을 의식하고 그것을 고상한 귀족을 위한 연극이 아니라 속된 평민을 위한 연극으로 치환하는 윤리적 장치를 마련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키스 미 케이트'는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재탄생시킨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셰익스피어가 미리 심어둔 무의식적 암시를 20세기 상황에 맞춰 보다 구체화시켰다고 해야 정확할 것입니다.

세 번째 '깜짝 선물'은 2막 첫무대에 숨어 있었습니다. 1막에서 중세 코미디와 현대적 코미디 사이를 넘나들던 뮤지컬이 20분의 인터미션이 끝난 뒤 돌연 몽환적이면서 끈적끈적한 모던재즈공연으로 마술처럼 변신합니다.


극중 뮤지컬 공연의 인터미션 시간, 코러스 배우들이 잠깐 휴식을 취하는 무대 뒤 어두운 공간. '젠장, 더럽게 덥군' 쯤으로 번역될 '투 단 핫(Too Darn Hot)'이라는 재즈곡이 펼쳐지면서 숨막힐 듯 육감적인 재즈댄스의 향연이 펼쳐집니다. 이 곡은 '키스 미 케이트'의 수록곡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곡이기도 합니다.

클래식한 관현악과 재즈에 적합한 브라스밴드가 반반으로 구성된 16인조 라이브 밴드의 재즈기운 충만한 음악에 맞춰 독무와 이인무, 군무가 어우러지는 이 장면은 극의 흐름과 아무런 연관 없이 갑자기 던져집니다.

작곡가 콜 포터가 관객을 위해 준비한 깜짝 선물과 같은 이 장면은 구상화로 가득 채워놓은 화면 한복판에 추상화를 그려 넣은 현대미술 작품을 만났을 때와 같은 이질성을 불러일으킵니다.

그것은 마치 어지러운 꿈을 꾸다가 라디오의 음악소리에 문득 잠에서 깨어났는데 그때 마주한 현실이 오히려 꿈처럼 느껴지는 그런 순간을 조성합니다.

많은 뮤지컬을 봤지만 이처럼 독특한 경험은 드물었던 것 같습니다. 이 장면이 어떻게 들어가게 된 걸까요.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마도 작곡가 콜 포터가 이를 고집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콜 포터는 드라마의 극적 구성보다는 개별 에피소드의 시적 묘사를 좋아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어쩌면 이 장면은 작곡가로서 자신의 이름을 이 작품에 아로새긴 서명과 같은 것이 아닐까요. 부와 재능을 함께 갖고 태어나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행복한 작곡가로 불렸지만 마흔 여섯에 낙마사고를 겪은 뒤 여생을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알콜중독에 빠져 숨진 그의 독특한 숨결이 느껴지는 그런 장면입니다.

한여름 더위를 잊기 위해 뮤지컬관람을 원하시는 분들에게 '키스 미 케이트'를 권하는 데는 이 뮤지컬에 감춰진 이런 의외성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작품은 뮤지컬의 기본기에도 아주 충실합니다. 익숙한 내용을 살짝 비틀어주는 탄탄한 극적 구성, 청각적 기쁨을 안겨주는 음악, 춤과 노래 연기의 삼박자를 고루 갖추고 있습니다.


남경주-최정원 커플의 능수능란한 연기와 노래를 보고 있노라면 그들이 왜 한국뮤지컬을 대표하는 배우로 불리는지를 절로 수긍하게 됩니다. 여기에 캐서린의 여동생 비앙카 역을 맡은 백치미 가득한 로아레인 역으로 뮤지컬배우로 데뷔한 가수 아이비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4만~12만 원. 8월14일까지 서울 중구 장충단길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02-577-1987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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