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89>

  • 입력 2009년 9월 27일 18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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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 눈보라

189회

범인은 잡혀도 인생은 계속된다.

노민선의 유죄가 확정된 지도 3개월이 지났다.

은석범 검사와 남 앨리스 형사는 연쇄살인을 해결한 일등 공신이었지만 보안청을 사직할 수밖에 없었다. 석범에게는 기밀누설죄가 적용되었고 앨리스는 인권을 인정받지 못했다. 찰스 사장 역시 유죄 판결을 받고 감옥에 갇혔고, 로봇전용 방송국 <보노보>는 서울특별시로 운영권이 넘어갔다.

"다 썼어요?"

앨리스가 단발머리를 찰랑댔다. 석범은 화면을 손으로 가리며 짜증을 내는 척했다.

"제발! 어디 좀 나갔다 와."

"치, 뭐 그렇게 대단한 걸 쓴다고 벌써 세 시간 째 낑낑대는 거예요? '특별시 싫은 사람 다 모여라!' 이러면 간단히 끝날 일을. 누가 음유시인 아니랄까봐서."

"그럼 남형사가 쓰지 왜 나한테 이런 걸 시켜?"

석범이 실눈을 뜨며 따지듯 물었다.

"통나무집을 다녀온 뒤론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고요. 범인 때려잡는 거라면 자신이 있는데, 글이랑 저랑은 안 맞는 거 검사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 그럼 난 잠시 옆방에 가 있을 게요. 그렇지 않아도 보르헤스와 세렝게티가 오기로 했거든요."

"두 사람은 SAIST에 계속 근무하게 되었나?"

"아뇨. 대뇌수사팀이 해체되는 것보다 빨리 차세대로봇연구소도 문을 닫았거든요. 두 사람은 각자의 고향으로 내일 떠난답니다. 그곳 로봇 연구소에 취직이 되었다네요. 둘 다 격투로봇 연구는 접고, 세렝게티는 동물 로봇, 보르헤스는 예술 로봇 쪽으로 연구 방향을 정했답니다. 다 끝나면 연락 줘요. 작별 인사는 해야겠죠?"

앨리스가 나간 후에도 석범은 30분 남짓 글을 썼다가 지우고 또 쓰기를 반복했다. 생각이 막힐 때면, 탁자 위에 놓인 손미주의 저서 <나는 로봇에 반대한다>와 <도시의 종말>을 펴 밑줄을 그었다.

휴우!

석범이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쉰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화면이 따라서 이동했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 '안내문'을 또박또박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눈보라 마을로 오세요!]

'눈보라 뒤에' 마을이 '눈보라' 마을로 다시 태어납니다.

우리는 폭력에 반대합니다. 우리는 로봇에 반대합니다. 우리는 거대도시에 반대합니다.

우리는 앞과 뒤의 구별을 두지 않으려 합니다.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살고자 한다면, 누구든 눈보라 마을에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만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인간을 중심에 두고 앞과 뒤를 가리지도 않습니다. 반인반수족이나 인권을 부여받지 못한 이들도 모두 환영합니다. 우리는 차이를 인정하며, 그 차이로 인해 일어나는 문제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결코 우리끼리만 평화롭고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눈보라' 속에 있습니다. 산적한 세상의 문제를 우리는 우리만의 방식으로 정면으로 치열하게 부딪혀 해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믿고 기다립니다.

석범은 '우리는 '눈보라' 속에 있습니다.'라는 문장 다음에 '깨어 움직이지 않으면 쓰러지고 맙니다.'란 문장을 써넣곤 다시 큰 소리로 한 번 더 낭독했다. 그리고 연락처를 기입한 후, 미디오스피어에 '안내문'을 올렸다. 이제 특별시에서 할 일이 끝난 것이다. 보안청에선 눈에 띄지 않는 자리로 잠시 옮겨 쉴 것을 권했지만 석범은 사직서를 제출했다. 어머니 손미주의 뜻을 잇기 위해선 촌각을 아껴야만 했다.

석범이 특별시를 떠나 생태주의자들의 마을로 가겠다고 했을 때, 자연인 그룹은 반신반의했다. 손미주의 후광도 물론 있었지만, 자연인 그룹의 급진파들이 저지른 테러 사건을 직접 담당했던 이가 바로 은석범 검사였다. 석범은 앨리스와 함께 다섯 차례나 그룹 지도자들을 만나서 의지를 밝혔고, 또 마을 이름을 바꾸는 문제부터 앞으로의 활동에 대한 의견서 제출했다. 지도자들도 '눈보라 뒤에' 편안히 머무르기보단 '눈보라' 속으로 뛰어들자는 석범의 주장에 동의했다.

노크 소리가 경쾌했다.

"그래. 이제 다 끝났어. 조금만 기다려."

석범은 앨리스가 두 연구원과의 작별 인사를 종용하기 위해 찾아왔다고 여겼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면서 작고 날렵한 몸매의 백발 여인이 늙은 사내 셋을 데리고 들어왔다. 석범의 두 눈이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왕고모!"

이윤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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