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88>

  • 입력 2009년 9월 24일 14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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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 Or Id: 인간은 왜 증오하는가?]

증오는 삶의 에너지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는 사람은 그 순간 살아갈 이유를 얻는다. 단 하나의 목표가 생기고, 증오를 실현하기 위해 그리고 복수하기 위해 계획하고 준비한다.

동물도 증오를 하고 복수를 계획할까?

과학자는 아직 인간 외에 증오하는 동물을 찾지 못했다. 높은 사회적 지위에서 밀려나 비굴하게 적응하는 사자의 행동이 관찰된 바는 있지만, 복수의 칼날을 갈며 우두머리를 증오하는 사자를 본 적은 없다. 눈치를 보며 배회하거나, 적응하기 위해 폭행당한 기억을 지우려는 원숭이는 있어도 분노의 순간을 자꾸 되뇌며, 증오를 간직하려는 원숭이는 관찰된 바 없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동물들은 짧은 기간 서로 사이가 안 좋을 순 있어도, 죽이고 싶도록 증오하거나 나중에 기어이 복수하는 일 따위는 없다. 미움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언젠가는 복수할 날을 기다리며 준비하기엔 동물들은 제 살길이 바쁘다. 오직 인간만이 미움의 순간을 곱씹으며 슬픔과 분노의 감정을 추억한다.

노민선을 오늘까지 살게 한, 그녀를 최고의 신경과학자로 만든 것은 '동네 한 바퀴'를 어슬렁거린 깡패들이었다. 그들에 대한 증오가 그녀의 눈을 멀게 했다. 증오는 오직 인간에게만 '삶의 에너지'다. 그녀는 그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모든 것을 읽고 모든 것을 익히고 모든 것을 준비했다. 뇌 신경과학자가 된 것도, 그 중에서도 특히 증오를 연구한 것도, 매일 밤 찾아드는 악몽을 지우기 위해 자동 작곡 시스템을 설계한 것도 이 삶의 에너지 때문이다. 증오가 없었다면 어제도 없고 오늘도 없으며 또 내일도 없을 테니까, 인간의 역사는 어쩌면 이 증오를 기반으로 흘러왔는지도 모른다.

19세기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라는 제목을 통해, '전쟁'과 '평화'를 동등하게 놓았지만, 전쟁은 언제나 길고 잔인하며 평화는 짧고 불안하다. 평화란 증오가 폭발하기 전 '전쟁이 아닌 일시적인 상태'를 나타내는 것일 뿐, 전쟁과 맞먹을 수 없는 개념이라는 주장이 점점 설득력을 얻고 있다.

증오는 그 에너지를 한데 모은다. 축구선수들이 일부러 상대 선수들의 반칙을 과장하고 화를 돋우면서 경기에 임하듯, 증오는 분산된 에너지를 한데 모아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게 한다. 없어보이던 사람도 분노의 순간만큼은 힘이 세다. 증오와 복수심으로 불타는 사람만큼 무서운 눈매를 가진 이는 없다.

자신의 어미를 공격한 사자를 찾아 평생을 해맨 자식 사자를 본 적이 없지만, 그런 사자가 나타난다면 그는 평원의 우두머리가 될 것이다. 아무리 나약한 사자도 복수심에 불타면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 인간에게 증오는 복수의 에너지를 생산하게 만든다. 삶의 순간들에 분산된 에너지들이 증오를 중심으로 한데 모여 엄청난 힘을 만든다.

인간의 뇌엔 '증오 회로'(hate circuit)라는 게 있다. 노민선의 뇌에서 가장 발달해 있을 '증오 회로'는 과연 어디일까? 2008년 영국 런던 대학 (University College London) 신경과학과 세미르 제키와 그의 연구동료 들은 인간의 증오심이 만들어지는 뇌 영역을 찾아 나섰다. 그들의 실험에 따르면, 인간의 뇌엔 분노의 상황에서 미움을 표상하는 특정 회로가 있다.

우선 정확한 상황 파악을 하기 위해 대뇌 전두엽이 회로 안에 포함돼 있다. 복수의 칼을 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바라보며, 전두엽은 그것이 결코 옳은 상황이 아니며 분노의 대상을 명확히 찾고 자신의 다음 행동을 결정한다. 이곳이 잘 발달하면 지능이 높고 용의주도하게 행동하는 법. 전두엽 발달에 있어 노민선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대뇌 안쪽에 증오 회로를 이루는 중요한 뇌 영역이 두 군데가 있다. 하나는 인슐라(Insula), 다른 하나는 조가비핵(Putamen)이다. 인슐라는 역겨움을 상징하는 곳. 길을 가다가 배설물을 보거나 구토물을 봤을 때 난리가 나는 영역이다.

사회적인 고통도 함께 표상하며, 분노와 공격적인 행동도 이곳에서 처리된다. 인슐라가 활성화되면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비이성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으며, 나중에 후회할 만한 행동도 그 순간엔 참을 수 없다. 동네 한 바퀴에서 밤새 폭행을 당한 그녀의 엄마를 떠올리는 순간, 노민선의 인슐라는 과부하가 걸린다.

조가비핵은 원래 운동을 조절하는 대뇌기저핵의 일부분이다. 이곳을 자극하면 성취동기가 강해지고 특정 행동이 강화된다. 오로지 그것만을 생각하며 이를 준비하기 위해 삶을 통째로 바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영역들이 인간의 모성애를 표상하는 영역과 일치하거나 매우 가깝게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엄마가 무조건적인 사랑을 자식에서 바치는 곳, 그녀의 삶의 동기이자 에너지, 그리고 엄청난 힘을 한데 모으게 만드는 모성애는 증오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모성애를 방해하면 증오가 되듯, 노민선 역시 엄마 사랑이 한순간 증오를 잉태했다.

2018년 4월 사이언스에 실린 싱가포르의 신경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증오 회로가 장기기억을 담당하는 해마와 연결돼 있다고 한다. 그 뿐만 아니라, 증오의 기억은 쉽게 장기기억으로 넘어가며 시간이 지나도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배신에 떨고 증오와 분노가 치밀어 오르며 복수심에 불타는 기억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증오기억은 우리 대뇌에 아로새겨져 평생을 같이 간다. 온전히 복수를 마치고 분노와 증오가 사그라지는 순간, 비로소 증오기억은 오래된 기억으로 잊힐 수도 있으리라.

증오 회로가 작동하기 시작하면 폭력적인 행동을 유발하는 아드레날린이 마구 분비된다. 혈압이 오르고 몸이 따스해지는가 싶더니, 주먹이 불끈 쥐어진다. 몸이 떨리고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다. 이성은 마비되고 고통스런 감정이 대뇌로 몰아닥친다. 증오는 폭력을 부른다.

결투는 칼솜씨가 아니라 복수심이 승부를 가른다. 누가 상대를 더 죽이고 싶어 하는가, 누가 상대를 죽이기 위해 칼끝에 힘을 모으는가가 승부를 결정한다. 하체가 처절하게 잘린 글라슈트의 에너지는 오로지 무사시에 대한 증오에서 나왔다. 미친 듯이 얼굴을 맞으며 분노를 키운 글라슈트의 파워는 오로지 슈타이거에 대한 복수심에서 나왔다. 미친 듯이 달려들어 주먹질을 해대는 글라슈트를 아무도 말릴 수 없었던 것은 그가 격투를 한 것이 아니라 복수를 한 것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증오회로의 실체가 완전히 벗겨지고 간단한 칩으로 재현할 수 있다면, 그래서 로봇에게도 복수심을 주입할 수 있다면 인간은 과연 로봇에게 증오회로를 선사할까? 그런 날이 온다면, 로봇 격투기 대회는 기술의 향연이 아니라 질퍽한 감정의 수렁으로 뒤바뀔 것이다. 아마도 복수심에 불타는 로봇들이 제일 먼저 공격할 대상은 우리 인간이겠지. 그들을 탄생시킨 창조주이나 그들이 가장 원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이니까.

어둠의 에너지, 폭력적인 에너지는 인간의 역사를 추동했다. 도시를 가득 메운 마천루와 자동차들, 인류가 이루어낸 찬란하고 거대한 문명은 모두 전두엽이 이룩한 성과지만, 강간과 폭행, 살인과 전쟁, 음모와 배신은 모두 인슐라와 조가비핵의 산물이다.

해가 뜨고 아침이 밝아오면 인간은 어제 그랬냐는 듯 활기찬 하루를 시작하고 커피향으로 활성화된 전두엽으로 일과를 계획하지만,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오면 증오와 복수를 표상하는 폭력의 에너지가 인슐라를 타고 꿈틀거린다. 그들은 자신의 대뇌에 술을 부어 이성을 멈추게 한 후, 증오를 발산하고 복수를 이야기하며 수많은 격투를 꿈꾼다.

이 도시의 문명도 해가 뜨고 지듯 전두엽과 인슐라가 번갈아 이룩한 찬란하면서도 부끄러운 인류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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