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74>

  • 입력 2009년 9월 6일 12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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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장 한 알의 밀알

SAIST에서 민선과 헤어진 후 쿼런틴 게이트에 도착한 석범은 곧바로 크리스탈 병원 24층 꼭대기에 마련된 입원실로 올라갔다. 보안청에서 의뢰한 일급 환자들만 이 병실을 썼다. 24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기 전, 퉁퉁 투웅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설마……?

불쾌한 얼굴이 24층 복도에서 석범을 기다리고 있었다. <보노보> 사장 찰스였다.

"오랜만이오. 은 검사!"

찰스가 억지웃음을 흘리며 먼저 인사했다.

"여긴 민간인 출입 금지 구역입니다. 내려가십시오."

석범이 원칙을 들이대자, 찰스가 피식 다시 웃었다.

"찰스를 우습게 보는 거요? 내가 출입하지 못하는 구역은 적어도 특별시엔 없소. 자, 보시오. 보안청에서 이중삼중 지키는 크리스탈 병원 24층에도 버젓이 들어와선 은 검사를 기다리고 있지 않소? 원한다면 특수대장이든 보안청장이든 연락을 취해도 좋소. 그들은 이미 내가 이곳에 12분 전에 도착했고 또 은 검사와 은밀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란 걸 알고 있다오. 그렇다고 상관들을 부패한 관리쯤으로 몰아세우진 마시오. 특별시에서 보안청만큼 깨끗한 기관도 드무니까. 개인적으로 그들에게 뭔가를 안긴 건 아니고, 뭐랄까 정치적 판단을 하게 만들었다고나 할까. 매일매일 생겨나고 없어지는 게 관청이라오. 나 정도 되면 보안청을 완전히 없애는 건 어렵겠지만 다른 청으로 바꾼다거나 혹은 쪼갠다거나 하는 문제를 특별시 정부가 의논하게 만들 수는 있소이다. 이래도 나와의 대화를 거절하겠소?"

찰스가 긴 설명을 늘어놓는 동안, 석범은 시선을 내려 찰스의 세 번 째 다리를 살폈다. 그 다리가 주욱 길어졌다가 둥글게 말리고 또 길어지기를 반복했다.

찰스도 초조한 게다.

"10분 드리죠."

"5분이면 충분하오."

석범이 앞장서서 빈 방으로 찰스를 안내했다. 멀리 펼쳐진 꽃언덕 풍광이 아름다웠다. 두 사람은 그 풍광을 내려다보며 나란히 섰다. 이번에도 먼저 말을 꺼낸 이는 찰스였다.

"관악산엔 가 본적 있소?"

"없습니다."

석범이 짧게 답했다. 예상대로 찰스는 옆방에 누워 있는 중환자의 일이 궁금한 것이다.

"악산이라 오르기 힘들지만, 물 맑고 골짜기 깊어 제법 정취가 있다오. 수술을 받기 전엔 자주 그 산에 갔었소."

"등산을 권하러 여기까지 오신 건 아니실 테지요?"

석범이 슬쩍 비꼬았다. 찰스의 눈빛이 달라졌다. 당장 세 번 째 다리로 석범의 등을 후려칠 기세였지만 콧김만 뿜고는 분노를 가라앉혔다.

"며칠 전 관악산에서 산불이 났다고 들었소. 통나무집 둘을 태웠다더군."

"<보노보> 사장님이 산불까지 관심을 가지십니까?"

석범이 계속 버텼다. 상대의 관심사를 파악한 이상 순순히 답을 줄 수는 없었다. 찰스의 힘은 특별시의 방송계와 정계 뿐 아니라 암흑세계까지 깊숙이 퍼져 있었지만, 아직 그가 저지른 악행을 밝히지는 못했다.

"은 검사! 자꾸 이러지 맙시다. 난 은 검사가 프로페셔널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도 사장님이 프로페셔널이라고 믿었습니다. 한데 아무 것도 내주지 않으시고 제 손바닥을 들여다보려 하시는군요."

석범으로선 잃을 것이 없었다. 어쩌면 오늘밤 아니 내일 아침이면, 대뇌수사팀에 그 혼자 남을 수도 있다.

"통나무집에서 세 사람을 구조했다 들었소."

역시, 그랬군!

석범은 찰스의 정보망에 감탄하는 것과 동시에 그가 세 사람 중 누구와 연결되었는지 궁금했다. 어쩌면 둘 혹은 셋 전부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과 만날 수 있겠소?"

"안 됩니다. 아무리 사장님이라고 해도 온몸에 화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는 중환자와의 면회는 사절입니다."

"사경을 헤매고 있다……."

찰스가 석범이 흘린 문장을 되풀이했다.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오?"

"불행하게도, 그렇습니다."

석범이 심각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회생 확률은 몇 퍼센트로 보고 있소?"

석범이 꽃언덕을 향했던 시선을 돌려 찰스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일급비밀을 전하는 첩보원처럼 찰스의 손바닥에 숫자'3'을 적었다. 97퍼센트의 절망 앞에서 찰스의 입가에 미소가 걸려 꽃처럼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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