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75>

  • 입력 2009년 9월 7일 13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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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슈트의 명예를 지켜주시오."

찰스는 작별의 악수를 나누며 뜻밖의 부탁을 했다.

"글라슈트의 명예라고요?"

"배틀원 2049 운영위원회는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우승 로봇이 바뀌는 것을 원치 않소. 축하연에서 벌어진 사고도 글라슈트의 잘못이 아니라 최 볼테르 교수의 작동 실수였다는 운영위원회의 공식 입장을 오늘 자정에 밝힐 예정이오."

"허나 그건 사실이 아닙……."

찰스가 말허리를 잘랐다.

"난 사실 따윈 관심 없소. 명예를 지키는 일만 생각할 뿐이요. 알아들었으리라 믿소."

석범은 찰스의 엘리베이터가 1층에 닿는 것을 확인한 후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살아 있음을 알리는 거친 숨소리가 병실을 가득 메웠다. 하반신은 벌써 절단 수술을 받았고, 양팔마저 어깨에서 떼어낸, 검은 토르소를 연상시키는 환자가 상체에 열일곱 개의 의료장비를 부착한 채 누워 있었다. 피부전체가 그을려 뭉쳤고, 사라진 코와 입술 대신 드러난 뼈와 이가 유난히 하얗게 빛났다. 머리카락은 물론 두피까지 타버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분간하기 어 려웠다.

"살아야 돼. 꼭!"

석범은 옆방에서 찰스의 손바닥에 회생 가능성을 '3'이라고 적었다. 그 사이 두 환자는 가능성 '0'에 닿고 말았다. 아직도 신원확인이 안 되는 원숭이 하체를 지닌 반인반수족과 글라슈트 팀 서사라 트레이너가 목숨을 잃은 것이다. 사라와 반인반수족 아래에 눌려 화기(火氣)를 상대적으로 덜 받은 남앨리스 형사만이 아직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다. 부엉이 빌딩에서 민선을 구했듯이, 사라는 이번에도 앨리스를 살린 것일까. 부엉이 빌딩에서는 둘 다 목숨을 건졌지만, 통나무집에서는 그 자신의 목숨을 지키지 못했다.

석범은 세 명이 아직 살아 있다고 찰스에게 거짓말을 했다. 둘이 죽고 하나만 살아남았다고 사실대로 밝히면, 암살자를 보낼 지도 모른다. 찰스라면 충분히 그런 악행을 저지르고도 남는다. 세 명이 고스란히 사경을 헤맨다면,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한 채 병상에 머무른다면, 적어도 24시간 정도는 인내심을 갖고 기다릴 것이다. 석범은 하루를 벌기 위해 24층 전담 의사와 간호사에게 그럴 듯한 협박과 회유를 이미 해두었다. 24시간이 지난 뒤에도 소식이 없으면, 찰스는 행동에 나설 것이다.

오늘처럼 정중히 나를 찾아오는 일은 없겠지.

석범은 민선에게도 이 사실을 숨겼다. 지금으로선 글라슈트 팀원 전체를 믿을 수 없었고, 민선은 그 팀의 핵심 맴버였다. 적어도 민선은 두 가지 사실을 그에게 알려주었다. 하나는 최 볼테르가 결승전 상대로봇 무사시에게 거액을 배팅했다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그들의 비밀연구소가 관악산에 있다는 점이다. 그 비밀연구소의 방화로 인해, 두 명이 죽고 한 명은 사경을 헤매고 있다.

"앨리스! 널 혼자 두는 게 아니었어. 미안해."

찰랑찰랑 붉은 단발머리를 흔들던 귀여운 얼굴을 되찾기는 어려우리라. 석범은 앨리스에게 단독 임무를 준 것이 후회스러웠다. 앨리스가 사라를 미행하겠다고 했을 때 곧바로 달려가서 합류했더라면, 이 끔찍한 상황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석범은 통나무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직 몰랐다. 한 가지 가설만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민선의 말대로 최볼테르가 뇌를 로봇에 이식했다면? 그와 연인 사이로 발전한 서사라도 이 사실을 알지 않았을까? 혼자보다 둘이라면 일을 도모하기 쉬웠을 테지. 남형사가 따라붙자, 사라가 그녀를 통나무집으로 유인하여 죽이려 했고, 격투가 벌어지는 와중에 화재가 발생했다면? 반인반수족과 사라는 처음부터 내통하였을 지도 몰라. <바디 바자르>의 단골손님과 무희였으니, 충분히 어울릴 만도 하지. 그럼 최볼테르, 서사라, 반인반수족들 그리고 아직 정확한 역할은 모르지만 찰스 이렇게 연결되는 건가. 최 교수와 피살자들의 관계도 100퍼센트는 아니지만 충분히 이어져. 꽃뇌는 어색한 부분이 있지만, 나머지 피살자들은 최 교수가 앵거 클리닉을 통해 모두 만났던 사람들이니까.

확실한 사실은 '배틀원 2049'를 마치자 연쇄살인도 끝이 났다는 것이다. 범인은 이 틀 안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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