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오진탁]이제 ‘죽음의 질’ 생각할 때다

  • 입력 2009년 5월 23일 02시 59분


대법원이 연명치료 중단을 허용하는 판결을 내렸지만 존엄사법 제정 이전에 우리 사회가 해야 할 일이 많다. 다른 무엇보다 우리 사회 죽음의 질은 과연 어떠한지 묻고 싶다. 존엄사 법제화를 논할 정도로 충분히 준비됐는지, 죽음문화 성숙을 위해 지금까지 어떤 노력을 했는지 묻고 싶다. 안타깝기는 하지만 우리 사회는 세계에서 죽음의 질이 아주 나쁜 나라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지 않을까.

자살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1위로 자살대국 일본을 훌쩍 넘어섰다. 한국청소년상담원이 2007년 청소년 4575명을 대상으로 조사했을 때 100명 중 59명이 자살충동을 느끼고, 100명 중 11명이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고 한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인정한 조사도구로 우울증 유병률을 조사했을 때 10명 중 5명 정도가 우울증세로 판정받는다. 노인의 경우 자살 충동률이 80%가 넘는다. 게다가 대부분 편안하게 죽어가지 못한다.

우리 사회는 또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죽으면 다 끝나는가. 인간은 육체만의 존재인가. 전국의 의과대학에 죽음을 가르치는 관련 교과목이 개설돼 있는가. 생사학을 연구하고 웰다잉(Well dying) 교육을 할 수 있는 전문가는 얼마나 되는가. 병원에서 죽는 사람이 갈수록 늘어나는 요즘, 병실과 장례식장 사이의 중간단계인 임종실을 운영하는 병원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준비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의사와 간호사는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임종환자를 보살핀다.

의료현장에서는 심폐사와 뇌사를 죽음으로 정의한다. 인간은 육체만의 존재, 죽으면 다 끝난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심폐사와 뇌사는 의학적 죽음 판정의 기준에 불과할 뿐이지 결코 죽음의 정의가 될 수 없다. 인간은 육체만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WHO는 육체적 사회적 정신적 영적 4가지 측면에서 건강을 말한다. 그렇다면 죽음도 육체적 사회적 정신적 영적 4가지 측면에서 접근하는 자세가 바람직한데 우리 사회는 육체의 죽음, 연명치료 중단 여부에만 초점을 맞출 뿐이다.

죽음을 바르게 이해하지 않는 사회에서 존엄사를 서둘러 법제화한다고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다. 우리 사회에서는 지금까지 죽음을 일상대화의 주제로 올리는 사람이 거의 없고, 평소에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도 찾아보기 어렵다. 죽음의 이해와 임종방식이 충분히 성숙되지 않은 상태에서 존엄사를 성급하게 법제화한다면, 현대판 고려장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대법원 판결을 계기로 이제부터 학교와 사회에서 웰다잉 교육을 실시해 죽음에 대한 바람직한 이해와 성숙한 임종방식을 확산시키고 호스피스 제도를 활성화하도록 제도적 뒷받침을 해야 한다. 또 생전유언(리빙 윌)과 사전의료지시서 표준양식을 만들어 이에 동의하는 사람은 서류에 서명해 준비하는 등 죽음문화 성숙을 위한 개인적, 사회적 노력을 시작했으면 한다.

일본의 경우 알폰스 데켄 교수가 1975년 도쿄 조치대에 ‘죽음의 철학’ 강좌를 개설한 이래 30여 년간 전국에서 다양한 웰다잉 사회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또 자기가 원하는 임종방식을 준비하는 생전유서에 서명한 사람이 12만 명을 넘었다.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2000년에 자연사법을 제정한 대만은 존엄사를 인정하기까지 7년의 시간이 필요했음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우리 사회도 죽음이해와 임종방식의 성숙을 위한 개인적 준비와 사회제도 정비를 차분히, 또 꾸준히 진행하면서 존엄사 법제화를 모색하는 일이 순리다.

오진탁 한림대 교수 생사학연구소장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