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85>

  • 입력 2009년 5월 4일 11시 50분


기브 앤 테이크의 함정 : 주고받다 보면 무엇이 '기브'이고 무엇이 '테이크'인지 헛갈린다. 남녀관계라면 더더욱 그렇다.

석범은 깨끗하게 정돈된 욕실에 서서 잠시 거울을 쳐다보았다.

충혈된 눈, 쏙 들어간 볼, 갈라진 입술은 뇌를 가져가는 연쇄살인 사건 수사의 어려움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악몽은 사라졌지만 초조함은 여전하다. 대뇌수사팀은 기다리고 있다, 네 번째 피살자가 나타나기만을. 그러나 뇌가 또 사라진다면 살인범을 추격하기 어렵다. 답답하다. 지금으로선 할 일이 없다. 젠장!

자신에게 되물어본다.

정말 서사라에 대한 보강 수사 차원에서 노민선을 찾아왔는가? 100퍼센트 오로지 그것만이 목적이었을까? 기브 앤 테이크! 악몽을 고쳐주겠다는 제안을 단번에 받아들인 것도 오로지 수사를 위해서?

"서둘러요. 빨랑! 2분 32초 후엔 주차장을 벗어나야 해요."

민선이 욕실문을 탕탕탕 쳤기 때문에 석범은 얼굴만 대충 씻고 서둘러 나왔다. 그를 이끌고 주차장으로 내려간 민선이 조수석을 차지했다. 석범은 운전석에 일단 앉은 후 이 낯선 상황을 따져 묻기로 했다.

"수동 전환을 해뒀어요. 목적지까진 안내 영상이 계속 나올 겁니다."

"목적지?"

"달섬!"

"달섬이라고 했습니까? 특별시 경계 밖에 있는 그 달섬?"

"맞아요. 그래서 블라인드를 치지 못하는 거예요. 특별시 경계 밖으로 나갈 차량은 주차장에서부터 목적지까지 블라인드는 물론 자동운전도 금한다는 법 조항을 모르진 않겠죠?"

"가려거든 혼자 가십시오. 난 내리겠습니다."

"나이트메어를 고쳐드렸으니 치료비를 내셔야죠. 지금부터 딱 두 시간만 숙면을 취할 거예요."

"숙면? 잠을 잔단 말입니까?"

"은 검사님이 쿨쿨 꿈나라를 헤매는 동안 꼬박 두 시간을 입체모니터로 잠자는 뇌 체크하느라 눈이 빠지는 줄 알았어요. 치료비는 달섬 왕복 운전으로 대신하겠어요. 어차피 아직 공무를 시작하기엔 이르잖아요? 자, 잡담은 그만하죠. 나는 자고 은 검사님은 운전하고, 달섬에서 함께 아침 먹고. 오케이?"

민선이 길게 하품을 하고 몸을 뒤로 젖혔다. 의자는 순식간에 일인용 침대로 바뀌었고 잔잔한 음악까지 깔렸다.

"이 자장가도 악몽 예방 게임으로 만든 거예요. 좋죠? 어물거리지 말아요. 두 시간 안에 도착하지 못하면 치료비 몽땅 더블로 받을 거니까."

석범은 수동전환 시스템을 처음부터 재정비했다. 민선은 핸들만 수동으로 놓고 나머지는 모두 자동으로 뒀지만, 그는 직접입력에 '2009'를 써넣었다. 2009년 식으로 핸들은 물론 브레이크와 액셀러레이터 그리고 기어까지 수동 운전으로 바꾼 것이다.

"정말 2009년 수동식을 선택하시겠습니까? 한 시간에 최소한 일 분 이상 차를 세우고 목과 어깨 그리고 발목과 팔목을 스트레칭 해야 합니다. 이런 번거로움이 싫으시다면 자동운전으로 전환하십……."

영상 안내는 자동운전시스템 회사의 협찬을 받고 있음이 분명했다. 근육과 관절을 움직여서 운전하던 옛 시절의 향수로 젖어들려는 이들에게 수동전환 확인이랍시고 '번거로움' 운운 떠벌리는 것이다.

5년 만인가.

마지막으로 2009년 식 수동운전을 한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대뇌수사팀에서는 앨리스나 다른 형사들이 운전을 맡았고, 혼자 이동할 때는 대부분 자동운전을 택했다. 범인을 쫓아 차선을 넘나들며 도로를 질주하는, 낡은 영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위험하면서도 근사한 일들을 석범은 단 한 번도 겪은 적이 없었다. 도로로 들어선 차들은 전부 특별시 보안청의 교통 담당 서버에 확인이 되기 때문에, 범법자일수록 도로를 피했다. 도로에서 차를 몰고 달아나는 짓은, 나 여기 있으니 어서 잡아가세요! 라는 신호를 보안청에 보내는 것과 같다.

보안청에서는 수동운전 차량을 실시간으로 확인했다. 자동운전의 경우 시스템만 장악하면 그만이지만, 수동운전은 언제 자동차가 사고를 일으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차체가 흔들리거나 속도의 변환 폭이 30킬로미터 이상이면 수동운전을 자동운전으로 강제 전환시키고, 엄청난 벌금을 부과했다. 한 시간을 달리고 일 분을 정차하지 않는 경우에도 똑같은 징계가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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