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47>

  • 입력 2009년 3월 11일 13시 39분


모든 범인은 사건 현장에 흔적을 남긴다.

연쇄살인이냐는 앨리스의 물음에 석범은 즉답 대신 개처럼 거실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바닥에 깔린 카펫의 결을 살피며 한 무릎 한 무릎 나아갔다. 처음엔 비틀대며 맴을 돌더니 점점 안방으로 향했다. 병식이 검지로 관자놀이 근처를 빙빙 돌리자 창수가 피식 웃었고 앨리스는 눈을 부라렸다.

이윽고 석범이 안방 문을 조심조심 밀고 들어갔다. 서늘한 기운이 얼굴을 확 덮쳐왔고 커튼이 제멋대로 흔들렸다. 눈을 비비며 방을 가로질러 창문을 닫았다.

언제부터 열려 있었던 게지?

창문을 열고 지내기엔 아직 밤바람이 찼다. 석범이 다시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커튼이 흔들리고 어지러웠다. 44층 아래 밤거리를 노니는 행인들이 장난감 병정처럼 자그마했다.

이렇게 내다볼 때 뒤에서 목을……?

직접사인은 경부 압박에 의한 질식이었고 뒤통수에 퍼런 멍이 두 개나 발견되었다. 등 뒤에서 둔탁한 흉기로 내리쳐 기절시킨 다음 목을 조른 것이다.

외부 침입 흔적은 없었다. 현관에서 거실까지 어디에도 범인의 짓으로 의심되는 기물 파손은 발견되지 않았다.

늦은 밤, 혼자 사는 정희 씨는 순순히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범인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범인은 신발을 얌전히 벗고 정희 씨를 따라 들어왔다. 안방에서 정희 씨를 죽인 범인은 목숨이 끊긴 정희 씨를 천천히 거실로 끌어낸 후 뇌를 끄집어냈다. 안방에서 거실 쪽으로 쓸린 카펫의 결이 이 사실을 증명한다.

창이 아니라면 혹시?

석범은 침대 옆으로 가서 전등을 켰다. 침대를 덮은 이불은 적당히 부풀어 오른 채 네 귀퉁이가 반듯했다. 아침에 가정부가 청소한 그 상태 그대로일 것이다.

툭.

천장에서 사진 한 장이 떨어져 석범의 어깨를 쳤다. 허리를 숙여 사진을 집어 들었다. 푸들 한 마리가 네 발을 전부 축구공 위에 올린 채 섰다. 턱을 천천히 치켜든 석범의 두 눈이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축구공을 가지고 노는 개들의 사진이 천장에 빈틈없이 빽빽하게 붙어 있었다. 개들은 크기와 색깔이 제각각인 축구공을 앞발로 문지르고 이마로 받고 엉덩이로 밀어댔다. 정희 씨가 평생 키워온 개들인 듯했다.

석범이 침대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그 사진들을 한 장 한 장 노려보았다.

이번에도 뇌를 가져갔어. 개꼬리의 마지막 기억이 붉은 천으로 뒤덮인 것부터 이상했지. 이건 우연이 아니야. 개꼬리를 통해 스티머스의 사용법을 알고 있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고, 또 연이어 뇌를 가져감으로써 대뇌수사팀을 조롱한 거야.

뇌가 없다! 뇌가 없으니 스티머스도 무용지물이지. 놈은 어떻게 우리를 속속들이 알까? 내부인의 소행이라면…… 물론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대뇌수사팀원 중에? 앨리스나 창수나 병식은 그런 짓을 할 사람들이 아니지. 그럼 보안청 상부에? 우릴 노리고 범행을 저지를 이유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조롱하기 위해서? 아니야. 뭔가 더 큰 이유가 있겠지.

양손으로 고양이 세수하듯 얼굴을 비볐다. 천장에 붙은 개들이 당장 짖으며 달려들 듯 보였다. 석범이 갑자기 소리쳤다.

"지형사님!"

"예!"

병식이 급히 방으로 들어왔다.

"퍼그는 어딨습니까?"

석범이 천장에 붙은 퍼그들의 사진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병식도 석범의 시선을 따라 흘끔 천장을 쳐다본 후 어깨를 움츠렸다.

"함께 살해당했습니다. 일단 사체를 메디컬 존으로 보내 바이러스와 광견병 감염 여부를 검사 중이에요."

"지금 당장 성형사님이랑 둘이 가서 보안청으로 그 사체 가져오세요."

"네?"

"퍼그 사체를 가져 오라고요."

"그게 광견병 검사를 마쳐도 다른 검사들이 줄줄이 있습니다. 아무리 빨라도 내일 오전까지는 메디컬 존에서 빼내오기가……."

석범이 소리쳤다.

"당장 가져오지 않으면 지형사님과 저 둘 중 하나는 팀을 떠나게 될 겁니다. 어서 가세요. 수단과 방법 가리지 말고 가져와요."

"아, 알겠습니다."

병식이 창수와 함께 아파트를 나섰다.

혼자 거실에 남은 앨리스가 안방으로 들어왔다. 불같이 화를 내던 석범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침대로 올라가서 침착하게 퍼그들의 사진을 떼어내는 중이었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석범이 사진들을 앨리스에게 내밀며 물었다.

"남형사! 스티머스 말이야. 사람 뇌가 된다면 개 뇌도 가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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