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2>

  • 입력 2009년 1월 6일 02시 57분


일러스트레이션 김한민
일러스트레이션 김한민
Airport is……?

어떤 상처의 끝이면서 어떤 치유의 시작입니다!

어떤 ( )의 끝이면서 어떤 ( )의 시작입니다!

서울특별시 인천공항 엘리베이터는 독특한 나선형 궤적으로 유명하다. 휘돌 때마다, 광고문구가 별똥별처럼 꼬리를 끌며 천장에서 떨어졌다. 대기실 뒷자리 창문 아래를 차지한 푸른 눈의 사내는 혼잣말을 뇌까렸다.

“……어떤 사랑의 끝이면서 어떤 배신의 시작인가, 결국엔!”

사내는 탑승을 기다리며 『서울특별시의 뱀』이란 디지털북을 탐독했다. 관련 사진과 동영상 수록은 물론이고 저자와의 인터뷰나 독자들의 채팅도 디지털북으로 가능했다. 이 동물 모음집의 2039년 종이책 초판본 제목은 『대한민국의 뱀』, 가격은 4만5000원이었다.

2040년 미합중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핵전쟁이 임박했을 때, 유엔은 인류의 마지막 세계대전을 막고자 신속하고 놀라운 결의를 이끌어냈다.

국가 단위 대신 특별시 단위로 세계질서를 재편한다!

이것이 249개 회원국 정상의 서명이 첨부된 결의문의 핵심이었다. 으르렁대던 두 거인도 결국 결의안을 받아들였다. 특별시연합 창설과 동시에 제정된 <과거 회귀 방지를 위한 특별법>에 따라, 국가를 연상시키는 단어 사용이 전면 금지되었다.

2040년 237개 특별시가 등록했고, 그 후로 9년 동안 63개의 일반시가 특별시로 승격하여 올해로 꼭 300개를 채웠다. 특별시 승격 기준은 까다로웠다. U-City(유비쿼터스 도시)는 기본이고 치명적인 슈퍼 병원체로부터 안전한 위생 체계를 갖춰야 했다.

사내의 시선은 마지막 장의 은초롱뱀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특별시의 손재주 비상한 과학자들이 만든 유전자변형 독사는 코브라보다 92배나 독성이 강했다. 입맛이 특이하여 쇠붙이를 즐겼는데, 자동차를 조각조각 뜯어 삼킨 후에는 잠만 잤다. 은초롱뱀의 독특한 식습관으로부터 비롯된 길고 달콤한 잠은 ‘전기 잠(Electric Sleep)’으로 『특별시연합공용어사전』에 실렸다.

마지막 탑승 안내방송을 듣고서야 사내는 디지털북을 끄고 출구로 향했다.

“손을 올려주세요.”

왼손을 넓적한 개찰 도우미 로봇의 머리에 얹었다. 깨알처럼 작은 보랏빛 알갱이들이 손가락에서 팔꿈치로 기어 올라왔다. 로봇의 삼각형 눈동자가 모나게 한 바퀴 굴렀다.

“반갑습니다. 스미스 씨! 제주 여행은 즐거우셨나요?”

손목 혈관 대조만으로 관광객의 인적사항과 여행 경로, 구입한 선물 목록까지 확인이 가능했다.

“무척 좋았소.”

사내가 착석하자 안내방송이 나왔다.

“서울특별시에서 뉴욕특별시까지는 3시간 30분이 걸릴 예정입니다.”

창을 통해 활주로로 다가가는 비행기의 날개와 앞바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떤 사랑의 끝이면서 어떤 배신의 시작을 되새김질했다.

반 년 전, 사내는 은초롱뱀을 훔쳐 기르기 위해 서울특별시로 들어왔다.

몇 번 단둘이 식사하고 공원을 산책하는 사이, 유전형질연구원 박진숙은 이 멋쟁이 사업가에게 반해버렸다. 사내는 동물을 좋아했고 특히 파충류라면 모르는 것이 없었다. 진숙이 용기를 내어 결혼 이야기를 꺼냈을 때 사내는 기다렸다는 듯이 승낙했다. 진숙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결혼식을 일주일 앞두고, 사내가 은초롱뱀을 구경시켜 달라고 부탁했을 때, 진숙은 거절했다. 은초롱뱀이야 나야? 양자택일의 기로에서도, 사랑은 사랑이고 일은 일이라며 못을 박았다.

사내는 구획 짓는 사랑 대신 경계 없는 배신을 택했다. 웨딩드레스를 함께 고르기로 약속한 2049년 1월 4일 월요일이 배신의 첫날이었다. 때마침 새벽부터 서설(瑞雪)이 고왔다.

<앙상블>에서 진숙을 죽인 뒤, 사내는 호주머니에서 사마귀를 닮은 미니 수술로봇을 꺼냈다. 팔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려면 더 세밀한 수술이 필요했지만, 어차피 잠깐 쓰고 버릴 팔이었다. 로봇은 사내의 기계 팔을 먼저 뽑았다. 그리고 진숙의 오른 팔꿈치 아래를 절단한 후 인공혈액을 주입했다. 혈관 수축과 변형을 막기 위해서였다. 기계 팔을 썼던 자리에 절단한 진숙의 팔을 부착하는 것으로 수술은 끝났다.

사내는 곧장 유전형질연구소로 달려갔다. 경호로봇의 머리에 오른손을 얹고 출입문을 통과했지만 은초롱뱀은 없었다. 진숙의 생체신호가 끊기자마자 경고문이 연구소에 접수된 것이다. 연구파일은 삭제되었고 중요 연구대상은 옮겨졌다. 당연하게도 은초롱뱀은 그녀의 톱 시크릿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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