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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9월 1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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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올림픽이 보여줄 진실
야곱은 장애인이었다. 천사와의 싸움에서 엉덩이뼈를 다쳐 다리를 절게 됐다. 그는 더는 발칙하고 영민했던 꾀돌이로서 살아갈 수 없다. 그는 느려졌고 고요해졌고 거기서 자신의 신을 만났을 것이다. 야곱이 이스라엘의 원조가 된 것이 장애인으로서 살게 된 이후인 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장애인 올림픽이 있다. 양궁도 있고, 역도도 있고, 수영도 있고, 탁구도 있고, 육상도 있다. 경쟁의 논리, 승자의 논리를 논리의 전부라 밀어붙이는 자본주의가 경쟁 밖에서 경쟁을 하며 경쟁을 넘어선 세상의 꿈을 꾸는 사람들의 진실을 알까? 우리가, 신체적 결함이 제일 무서운 결함이라는 스포츠에서 신체적 결함을 드러내고 극복하며 어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사람들의 진실을 볼 수 있을까?
어찌 보면 스포츠에서 찬사 혹은 비난은 부차적이다. 찬사에 우쭐대는 선수라면 쉽게 비난에 휘둘리게 마련이다. 그는 승자나 패자가 될 수는 있겠다. 그러나 스포츠를 하면서도 스포츠 정신에 도달하기는 힘들다. 스포츠 정신이란 무엇일까? 쏘고 던지고 치고 달리고 밀고 부딪치며 활이 되고 공이 되고 물이 되고 공기가 되어 마침내 자기 앞에 서는 일이 아닐는지.
우리가 본능적으로 스포츠 보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비만 없는 극한 시간이 만들어 내는 긴장미를 좋아하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말도 삼키고 생각도 끊고 ‘나’와 가장 가까운 몸을 도구 삼아, 경전 삼아 ‘나’의 신 앞에 서는 그 고독한 시간에 대한 그리움인지도. 그 점에서 나는 느림을 타고난 이들의 스포츠가 훨씬 더 많은 점을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사실 상처 없는 영혼이 없듯 누구에게나 장애가 있다. 장애 뒤에 숨어 장애를 숨기면 장애는 ‘나’를 가두는 감옥이지만, 장애를 친구처럼 편하게 받아들이면 거기서 하늘이 열린다. 독일의 영성가 안셀름 그륀은 이렇게 말했다. “상처를 통해서 내가 참으로 누구인가를 알게 된다. 바로 그곳에서 나의 마음을 만날 수 있으며, 숨겨진 보물인 나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6일부터 열리는 장애인 올림픽에서 우리는 몇 개의 메달을 목에 걸까? 8월의 올림픽만큼 장애인 올림픽에도 관심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그러면 우리 사회를 규정하면서 억압하는 경쟁의 논리, 승자의 논리 이상의 교훈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사회체육 수준 높이는 계기로
사실 올림픽의 메달 수는 그 나라의 사회체육 수준일 때 의미가 있다. 메달은 한순간이고 변함없이 남는 것은 일상이니까. 솔직히 ‘태릉선수촌’이라는 선발과 집중지원을 통해 특수하게 길러진 우리의 메달이 우리 국민의 스포츠 수준이고 건강 수준이라 할 수 있을까?
나는 기대한다. 과도하게 우리를 드러낸 저 자기최면의 기저가 다시 태릉선수촌만 지원하는 계기로 작용하기보다는 국민의 사회체육 수준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를. 국민의 건강을 지켜주는 체육의 저변 확대 없이 올림픽 메달 수에만 집착하는 사회는 성숙한 사회라 할 수 없다.
장애인에겐 일상적인 체육이 더더욱 절실하다. 그들에게 운동은 몸의 절박한 요구다. 장애인을 사회의 그늘로 숨기지 않고 두려움 없이, 불안 없이 섞여 살게 하는 나라가 선진국이다. 우리 주변의 장애인이 얼마나 편안하게 자기에게 맞는 운동에 접근할 수 있는지, 이참에 장애인 체육시설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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