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8년 6월 16일 02시 57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톨레랑스는 인간이 항상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이성적 인식에 기초한다. 자신의 종교, 사상과 다른 것들을 용인하는 것이다. 16세기 종교개혁으로 개신교의 자유를 요구하는 종교적 톨레랑스로부터 시작됐다. 중세, 즉 진실이 왕과 가톨릭에만 있었던 시절, 앙리 4세는 1598년 낭트 칙령(The Edict of Nantes)을 선포해 종교적 관용(religious toleration)을 실현했다.
이런 톨레랑스 정신은 프랑스가 오랜 경험을 통해 터득한 공존의 대원칙이다. 다원화된 민주사회에서 서로 다른 종교, 사상, 신념 등을 용인함으로써 공존을 가능케 하는 사회적 덕목이다. 다민족, 다인종으로 구성된 프랑스가 중세 종교전쟁 시기의 가톨릭과 신교의 갈등, 프랑스 대혁명 전후의 귀족·성직자와 제3계급 간의 갈등 등을 거치면서 너무 많은 피를 흘린 데 대한 반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톨레랑스는 현실에서 3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종교적 관용’, ‘사회적 관용’, ‘시민적 관용’이 그것이다. 맨 앞은 신앙적 관용, 가운데는 자신의 도덕적 가치나 규범의 차이에 대한 관용, 마지막은 법과 실제 적용과의 차이를 인정하는 관용으로 볼 수 있다. 결국 톨레랑스는 틀림이 아니라 다름이라는 것이다. 나만 옳고 너는 그른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가치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톨레랑스는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인정한다. 또 사상의 자유를 보장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자유를 향유하는 만큼 타인의 자유도 함께 존중하는 것이다. 이는 합리성에 기초한 사회통합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요소가 된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다. 톨레랑스 정신과는 거리가 멀다. 오직 동색(同色)을 요구한다. 나와 다르면 그것은 곧 이단이요, 비난의 대상이 된다. 지나친 민족주의, 사회적 집단주의도 이런 맥락이다. 교육현장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집단 이데올로기가 우선한다.
이제 교육현장에서 톨레랑스를 가르쳐야 한다. 우리 사회도 다원사회로 가고 있다. 다문화 가정도 급속도로 늘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들도 이미 우리 이웃이 됐다. 각 이익집단의 목소리도 커져 가고 있다. 우리가 톨레랑스를 가르쳐야 할 중요한 이유다.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에 기초한 민주사회에서 공존을 가능케 하는 것은 ‘톨레랑스’밖에 없다.
한병선 교육평론가 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