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차수]주는 사람이 먼저 안달해서야…

  • 입력 2008년 5월 21일 03시 01분


미국이 식량 50만 t을 북한에 지원하겠다고 발표한 뒤 대북 식량 지원 문제가 이슈로 떠올랐다.

‘햇볕정책’을 지지했던 좌파 인사들은 조건 없는 대북 지원을 주장한다. 굶주림에 시달리는 북한 동포들의 아사(餓死)를 막기 위해 하루빨리 북한에 쌀을 보내야 한다는 게 좌파의 ‘인도적 지원’ 논리다.

우파 인사들은 ‘한국 왕따’ 가능성을 걱정하고 있다. 북한의 ‘통미봉남(通美封南·남측을 배제한 채 미국과만 대화)’ 전략이 먹혀 들어가서 미국이 우리 어깨너머로 북한과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우리도 북한에 식량을 지원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비판이 쏟아지자 정부는 우왕좌왕하고 있다. ‘북한의 요청이 있어야 식량을 주겠다’고 했다가 ‘식량 사정의 심각함이 확인되거나 재해 발생 시 요청이 없어도 식량 지원을 검토하겠다’고 태도를 바꿨다. 당장 북한 주민이 굶어죽을 지경이라면 북한이 사정하기 전에 쌀을 보내는 게 동포로서의 도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 어떤 방식으로 쌀을 주는 게 한반도 평화와 북한 인권 개선에 기여할지 냉정히 따져봐야 한다. 먼저 북한의 식량 사정부터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올해 북한의 식량 부족량이 130만 t에 이를 것이라는 국제사회의 전망이 있지만 정작 북한은 함구하고 있다. 통일부는 북한의 현재 식량 사정이 절박한 상황은 아닌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북한에 지원하는 식량이 굶주리는 주민들에게 돌아가는지 확인할 수 있는 방안 마련도 선결 과제다.

굶주리는 주민을 인질로 삼고 체면을 내세우며 이명박 정부를 맹비난하고 있는 북한이 우리가 준다고 해서 흔쾌히 받을지도 의문이다. 주겠다는데 북한이 받지 않으면 남북관계는 더 꼬일 가능성이 크다. 남측은 2000년대 들어 매년 수십만 t을 북한에 지원했지만 북한은 감사 표시는커녕 핵실험을 강행해 긴장을 고조시켰다.

미국이 대북 식량 지원에 나선 이유와 북핵 협상 진행 상황도 꼼꼼히 짚어봐야 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악의 축’ ‘국민을 굶기는 독재자’라고 비난하던 미국이 북한의 인권 상황 불변에도 불구하고 북핵 문제의 진전을 이유로 식량 지원에 나섰기 때문이다.

미국은 최근 북한과의 잇단 협의를 통해 핵 기술을 다른 나라로 이전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의 핵무기 보유 저지보다 북한 핵의 외부 유출 차단을 우선 과제로 삼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상당한 성과를 거둔 셈이다.

그러나 남측에 당장 직접적인 위협 요소인 북한 핵폭탄 처리 문제는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미국이 북한의 핵폭탄 보유를 ‘상당 기간’ 용인하기로 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미국이 생각하는 북핵 문제의 진전이 남측 처지에서는 미흡한 것이 분명하다.

대북 식량 지원을 놓고 국론 분열 양상을 보일 것이 아니라 북핵 문제에 대한 한미 간, 남북 간 이견을 줄이는 데 노력을 집중해야 할 시점이다. 북한 체제의 모순이 개선되지 않는 상황에서 원칙을 저버린 채 식량을 지원한다면 퍼주기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지난 10년과 같은 상황이 되풀이될 공산이 크다. 당장 주고 싶더라도 북한이 손을 내밀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북한 주민의 삶도 나아지고 한반도 평화도 증진될 것이다.

김차수 정치부장 kimc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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