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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4월 2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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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품위 있는 오락프로로 신선한 자극”
1964년 봄 서울 광화문 동아일보 사옥 5층 동아방송(DBS) 뉴스센터.
수습 딱지를 뗀 김동건(당시 25세) 아나운서는 연기가 뿌옇게 찬 스튜디오에 앉아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채 원고를 읽었다. 방송 전 원고를 검토하며 피워 물었던 담배를 재떨이에 던졌는데 그 속에 있던 휴지에 불이 붙은 것.
김 아나운서는 억지로 기침을 참으며 10분 뉴스를 겨우 마쳤다. 시보까지 읽은 뒤 일어나려다가 주저앉고 말았다. PD와 엔지니어가 김 씨를 부축해 나갔다.
“처음 듣는 얘기야. 허허.”
“비밀이었죠. 당시 동아방송 뉴스는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이 많아 단어 하나하나에 주의해야 했어요. 스트레스 때문에 원고만 보면 습관적으로 담배를 물었죠. 그날 불똥이 튀어서 카펫에 옮겨 붙었다면 큰일 날 뻔했지. 하늘이 도왔죠.”
연극연출가 임영웅(74) 씨와 김동건(69) 씨가 22일 오후 서울 마포구 산울림극장 1층 카페에서 마주 앉았다. 동아방송 출신인 두 사람은 동아방송 개국 기념일(4월 25일)을 앞두고 당시를 회고했다. 1963년 개국 때 임 씨는 라디오 드라마 PD였고, 김 씨는 대학졸업반으로 수습 아나운서였다.
임=동아방송에는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젊은 기운이 충만해 있었어요. 프로그램 하나하나의 성취감이 굉장했어.
김=모체가 동아일보니까 뉴스가 가장 중요한데 군사정권이 주시하고 있어서 늘 살얼음판이었죠. 사회 전체에 총칼을 들이댔지만 동아방송은 굴하지 않았어요. 마이크 앞에서 뉴스를 읽을 때마다 등에서 식은땀이 났죠. ‘이런 뉴스 나가도 되나. 잡혀 가는 거 아닌가.’
임=동아방송은 정권의 폭압에 시달리던 청취자들이 목마르게 기다리던 뉴스를 과감히 내보냈지. KBS나 MBC는 못하는 뉴스였어요.
김=KBS 뉴스는 종일 비슷했는데 동아방송 뉴스는 시간마다 달랐어요. 진행 도중에도 볼펜으로 휘갈긴 기사를 데스크가 까만 색연필로 직직 고쳐 들고 들어왔죠.
임=뉴스가 중심이 되면서 오락프로도 품위 있게 만들어졌죠. 방송계 전체에 신선한 자극이 됐지. 최무룡 문정숙 씨를 내세운 라디오 뮤지컬도 있었고 ‘여명 80년’이라고 한국 근대사를 조명하는 다큐멘터리 대하드라마도 개국 때 선보였고.
김=동양방송(TBC) 라디오가 ‘여명 80년’을 따라서 ‘광복 20년’이라는 드라마를 했죠. MBC 라디오가 지금까지 하는 ‘격동’ 시리즈도 동아방송의 영향을 받은 거예요.
임=‘유쾌한 응접실’은 한국 토크쇼의 원조라 할 만해요. 양주동 박사, 극작가 이석우 씨, 서울대 김두희 교수 등 패널들이 앉아서 한 화제에 대해 여러 시각에서 재미있는 얘기를 했어요. 주제는 소박했지. ‘휴가’ ‘넥타이’ 그런 거였으니까.
김=말도 안 되게 좁은 장소에서 수십 명이 오전 5시부터 다음 날 오전 2시까지 매일 방송을 할 정도로 일이 많았어요. 집에 못 가는 건 다반사였고. 군인들이 건물을 빙 둘러싸고 있어서 며칠 동안 갇히기도 했죠.
임=일제강점기 같은 암흑기였어. 1964년에 고발 프로그램 ‘앵무새’가 내란 선동했다고 최창봉 방송부장 등이 구속됐지. 18년을 그렇게 어렵게 버티다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사라진 거야. 밖에서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그때 충격이란… 막막했지. 국민 모두 그랬겠지만 우리나라가 어떻게 될 건가 하는 걱정에 가슴이 아팠어.
김=허무했죠. 수많은 사람들의 땀으로 일군 방송국이 하루아침에 신군부의 한마디에 없어진 거죠. 계속 존재했다면 올해 개국 45주년 행사에 초대받았을 텐데…. 우리 방송사에서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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