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형 국가’에서배운다]<1>“기업인 짜증나게 하는 건…”

  • 입력 2008년 2월 20일 03시 03분


“규제 얽매인 기업인을 구출하라”1일 싱가포르 도심 래플스플레이스 전철역 인근에서 정부 주최로 규제 개혁 가두 캠페인이 열렸다. 규제를 상징하는 ‘붉은 띠(레드테이프)’에 얽매인 기업인이 고통스러워하자(위) ‘친기업 패널’이 이를 가위로 잘라내고 기업인을 구출했다(가운데). 규제에서 풀려나 함박웃음을 짓는 배우의 표정에서 싱가포르의 친기업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사진 제공 싱가포르 친기업 패널
“규제 얽매인 기업인을 구출하라”
1일 싱가포르 도심 래플스플레이스 전철역 인근에서 정부 주최로 규제 개혁 가두 캠페인이 열렸다. 규제를 상징하는 ‘붉은 띠(레드테이프)’에 얽매인 기업인이 고통스러워하자(위) ‘친기업 패널’이 이를 가위로 잘라내고 기업인을 구출했다(가운데). 규제에서 풀려나 함박웃음을 짓는 배우의 표정에서 싱가포르의 친기업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사진 제공 싱가포르 친기업 패널
싱가포르 기업인이 규제심사 참여…“민원 2주내 해결”

《1일 싱가포르의 사무실 밀집지역인 래플스플레이스 전철역 인근 공원. 관료주의를 상징하는 ‘붉은 띠(레드테이프)’에 감긴 기업인을 구출하는 규제혁파 퍼포먼스가 열렸다. 재계나 시민단체의 항의성 시위가 아니다. 정부 스스로 관료주의를 고발하는 행사다. 싱가포르 정부는 이날 규제 개선 아이디어를 내면 최고 1000싱가포르달러의 ‘친(親)기업 포상금’을 주겠다’는 계획까지 밝혔다. 더 줄일 규제가 남아 있을까 싶은 ‘기업 천국’ 싱가포르, 아일랜드, 덴마크. 하지만 이들 나라는 지금도 ‘규제와 전쟁’ 중이다. 한국 대불산업단지의 전봇대 같은 ‘주인 없는 규제’와 각종 인허가 과정에서 숨어 있는 ‘보이지 않는 규제’를 샅샅이 찾아 박멸하고 있었다.》

○ “전봇대, 이해가 안 돼요”

“이해가 안 되는데요.”

취재팀이 한국 대불산업단지의 예를 설명하며 “부처 간 업무 떠넘기기로 기업이 애를 먹는 일은 없느냐”고 묻자 덴마크 고용자협회(DA)의 헤닝 겔 이사가 보인 반응이다.

한참 설명을 들은 그는 “사업을 시작할 때 돈이 문제지 규제가 문제냐. 규제와 관련해서는 정부 부처 장관에게 언제든 직통전화를 걸 수 있고 바로 해결해 준다”고 말했다.

최근 덴마크에서는 공장 용지 조성 중 유적이 발견됐다. 지방정부는 발굴 작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인근의 다른 용지를 제공했다.

덴마크투자청의 용 토고 부국장은 “사업 초기에 부처, 지방정부, 대학 등 사업파트너와 얽힐 수 있는 문제는 덴마크투자청이,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면 지방정부가 전담 처리한다”고 말했다.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발생했을 때 민원을 해결할 주체를 정해 놓은 것.

싱가포르는 대불산단 전봇대 같은 문제를 ‘주인 없는 민원’이라고 부른다. 여러 부처가 얽혀 해결이 어렵기 때문이다. 싱가포르는 이처럼 여러 부처가 얽힌 ‘주인 없는 민원’만을 골라 해결하는 전담조직(ZIP)을 2000년에 신설했다. 범(汎)부처 기구인 ZIP는 그동안 기업이 제시한 100여 건의 주인 없는 민원을 해결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싱가포르에서는 공무원들이 범부처 간에 얽힌 실제 ‘주인 없는 민원’ 해결 사례를 배우는 ‘컷 더 레드테이프(cut-the-red-tape)’ 교육과정을 의무적으로 수강해야 한다.

○ 기업에 짐이 되는 모든 조항 분석

3개국은 이미 양적 규제 철폐를 끝내고 규제의 질을 높이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아일랜드 기업규제분석위원회는 골웨이대의 교수진에 의뢰해 기업법의 모든 조항을 분석해 ‘기업의 짐’이 되는 독소 조항을 분석하고 있다.

위원회의 돈 오코너 비서관은 “기업인이 사업 관련 인허가를 위해 공공기관에 전화를 걸고 구청에서 서류를 떼며 수수료를 내기 위해 은행을 찾아가는 데 드는 시간과 돈을 모두 비용으로 계산하고 규제의 타당성을 분석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기업이 내는 보고서가 종이 한 장에 불과하더라도 기업인들이 ‘짜증나게 하는(annoying) 규제’라고 여기면 줄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규제의 질을 어떻게 높일까.

“기업의 고객 서비스가 해답”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기업의 고객이 작은 불만을 받아들여 상품과 서비스의 질을 바꾸듯이 기업이나 국민이 제기한 불편 사항에서 단서를 얻어 규제의 질을 높인다는 뜻이다.

싱가포르는 기업 불만을 받아 처리하는 정부의 원 스톱 창구인 ‘친기업 패널’을 2000년 신설했다. 기업인, 언론인, 정부 고위 관료로 구성된 친기업 패널은 2000년 이후 1700여 건에 이르는 기업의 규제 개선 건의를 받았고 이 중 54%를 개선했다.

친기업 패널 측은 “온라인으로 민원이 접수되면 2주 내에 답을 해야 한다”며 “정부기관 국장급 이상 간부 100여 명으로 구성된 ‘기업스피드팀’이 관련 법률 검토 등의 지원을 한다”고 설명했다.

한국에서도 기업인에게 규제 심사 업무를 맡길 수 있을까. 아마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길 수 없다’며 반발이 대단할 것이다.

○ 규제 감축 실적 인터넷에 공개

덴마크 규제 개혁 결과를 묻는 취재팀에게 DA 관계자는 한 정부 인터넷 사이트 주소(www.amvab.dk)를 건넸다.

이 사이트는 덴마크의 정부 규제를 기업이 부담하는 비용으로 환산하고 지금까지 얼마나 규제를 줄였는지 그래프와 함께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각 부처의 규제 감축 목표와 실적이 만천하에 공개돼 말로만 규제 개혁을 외칠 수 없는 환경을 만들어 놓은 것. 지난해 12월 현재 덴마크 정부의 총규제비용은 2001년 대비 5.1% 줄었다. 총규제비용이란 기업들이 각종 신고사항이나 규제에 따라 정부에 보고해야 할 사항을 조사하기 위해 걸리는 시간 등을 금액으로 환산해 부처별 법규별로 집계한 금액.

싱가포르는 2003년부터 모든 행정기관의 ‘친기업 지수’를 평가하고 매년 결과를 공개한다. 평가 항목은 △규제 준수 비용 △규제에 대한 평가 △투명성 △고객 대응 △친기업 마인드 등 5가지다.

김종석 한국경제연구원 원장은 “한국의 기업하기 좋은 나라 순위를 현재 30위권에서 15위 이내로 올리려면 눈에 보이는 ‘규제’를 넘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규제인 ‘레드테이프’까지 획기적으로 없애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이병기 경제부 차장 eye@donga.com

싱가포르=박용 기자 parky@donga.com

코펜하겐·올보르=장강명 기자 tesomiom@donga.com

더블린=이지연 기자 chance@donga.com

■ 현지진출 기업인 경험담

“영업사원 같은 공무원 회사 홍보까지 챙겨줘”

국내 건설업체인 삼보지질의 허엽 사장.

그는 지난해 싱가포르 정부의 국책 사업인 ‘마리나베이 복합리조트’ 공사에서 호텔 건물 터를 파다 뜻밖의 난관에 봉착했다. 이곳에서 대형 크레인 작업을 하려면 현지 자격증이 필요했던 것. 한국 크레인 기사 5명은 현지 자격증이 없었다. 문제가 영어로 된 현지 자격증 시험을 한국 기사들이 볼 수도 없었다. 당시 건설 붐으로 현지인 기사를 찾기도 힘들었다.

허 사장은 담당 공무원을 찾아가 “한국 크레인 기사의 능력은 세계 최고이고, 한국의 자격증 관리도 싱가포르 못지않다”며 하소연했다. 솔직히 ‘이런다고 뭐가 달라질까’ 싶었지만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 잡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공무원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얼마 뒤 “한국 기사들이 싱가포르 교도소에 수감된 모범수 5명에게 크레인 운전법을 가르칠 수 있느냐”는 연락이 왔다. “2006년 도입한 ‘전과자 사회적응 프로그램’의 강사 자격으로 일을 가르치면 되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강사와 전과자가 크레인 운전법을 가르치고 배우면서 작업을 했다. 현지 자격증 없이도 일을 할 수 있도록 묘책을 낸 것. 기술을 배운 전과자들은 곧 자격증을 땄다.

한국의 바이오신약 전문회사인 ㈜쎌바이오텍 이용택 부장.

그는 2006년 유럽 시장 확대를 위해 해외법인 창설을 추진했다. 그가 주한 덴마크대사관 사무관에게 현지 지사를 내는 방법을 문의하자 곧 덴마크투자청 직원들이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다. 투자 유치를 위해 사업 상담을 해주고 돌아간 것. 그는 덴마크 공무원들의 자세에 혀를 내둘렀다.

지난해 초 덴마크 출장에서는 덴마크투자청 직원들에게 “벤처캐피털을 만나볼 수 있느냐”고 물었다. 바로 프레젠테이션 자리가 주선됐다. 이번에는 “회사 홍보 방법이 고민”이라고 말하자 덴마크의 한 신문사와 인터뷰 자리가 마련됐다.

출장 기간 중 덴마크투자청에서는 “더 필요한 게 없느냐”는 연락이 수시로 왔다. 이 부장은 “덴마크투자청 직원은 공무원이 아니라 세계 최고의 영업사원 같은 사람들”이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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