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홍찬식]총장님들 정치판 간 사이, 대학은?

  • 입력 2008년 1월 15일 20시 03분


대학은 12세기 유럽에서 시작됐다. 당시 파리대학의 논리학 교수였던 아벨라르는 왕과 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한 대가로 온갖 탄압에 시달렸다. 프랑스 왕은 끝내 자신이 통치하는 땅 어디에서도 강의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그러자 아벨라르는 나무 위에 올라가 강의를 계속했다. 왕이 금지한 ‘땅’을 피해 ‘공중’으로 올라간 것이다. 화가 난 왕이 다시 공중에서 강의하는 것마저 금지하자 그는 파리의 센 강에서 배를 탄 뒤 강변에 학생들을 모아놓고 가르쳤다. 이번엔 ‘물’을 택한 것이다. 왕은 그의 열정을 못 이겨 금지령을 풀었다. 오늘날 그는 ‘학문정신의 선구자’로 칭송받는다.

아벨라르도, 엘리엇도 없는 한국

현재 대학들이 누리는 자율과 학문의 자유는 이처럼 끊임없는 투쟁과 희생을 통해 쟁취한 것이다. 대학 총장이 자율의 수호자가 되는 전통은 13세기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시작됐다. 옥스퍼드대의 자율은 15세기에 벌써 완벽한 상태에 도달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선진국에선 대학 총장이 ‘최고경영자(CEO)형’으로 바뀐 지 오래다. 세계 1위 대학인 하버드대는 개교 이후 372년 동안 총장이 28명에 불과할 정도로 오래 자리를 지켰다. 찰스 엘리엇 총장은 1869년부터 40년을 재임했다. 하버드대의 성공비결은 ‘장수(長壽) 총장’들이 대학발전의 장기계획을 세운 뒤 철저하게 밀고 나간 데 있다.

한국 대학에는 아벨라르도, 엘리엇도 없다. 우리 대학들이 CEO형 총장을 찾기 시작한 것은 학생 수 부족으로 미달 사태가 빚어진 얼마 전부터의 일이다. 학문 자유를 위해서도 총장들이 한 일은 없었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엔 물론이고 노무현 정권 아래서 대학들은 눈치만 보다가 정권 말기에 이르러서야 자율권에 목청을 세웠다.

그런 총장들이 대통령선거를 전후해 정치판으로 몰려들었다. 정근모 명지대 총장은 대선 출마를 위해 총장을 그만뒀고, 박범훈 중앙대 총장은 총장직을 유지하면서 이명박 후보 문화위원장으로 일하다가 학교로 돌아가더니 다시 대통령취임준비위원장이 됐다. 윤진식 서울산업대 총장은 이명박 캠프로 가려고 총장을 그만뒀고 현직 총장인 허운나 한국정보통신대 총장과 황지우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은 공식 직함은 없었지만 여당 후보를 지원했다.

대선이 끝나고도 발걸음은 멈추지 않고 있다. 이경숙 인수위원장은 현직 숙명여대 총장이고 총리 후보에는 몇몇 전현직 총장들이 거론되고 있으나 누군가 사양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한국이 살아남기 위한 시대정신은 ‘세계적인 대학 육성’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유능한 총장에 의한 지속적인 개혁이 절실하다. 뒤늦게 대학개혁에 애가 닳은 프랑스의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미국처럼 대학 총장의 임기를 최대한 늘려주는 법안을 서두르고 있다. 현재의 5년 단임제에서 4년 연임제로 바꿀 계획이다. 그래야 지속적인 개혁 드라이브를 걸 수 있기 때문이다.

총장·교수의 외도, 대학 부실화 재촉

한국 대학에서 총장 연임은 매우 어렵다. 명문대일수록 더 그렇다. 특히 총장직선제가 시행되는 국립대에선 한번 총장을 지내면 빨리 자리를 비워 줘야 한다. 총장 대기자의 줄이 길기 때문이다. 경영을 겨우 알 만하면 자리를 떠나는 이런 풍토에서 개혁은 요원하다.

경제규모 세계 12위권인 한국이 대학경쟁력에서 세계 40위에 그치는 책임은 상당 부분 대학의 리더인 총장들에게 있다. 지금 정치판을 기웃거리는 총장들은 원래부터 사명감도,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었는지 모른다. 현실 정치나 국정에 경험이 없는 대학 총장들과 교수들을 ‘신선하고 무늬가 좋으며 약간의 아이디어가 있다’고 해서 대거 끌어들이려는 정부와 정치권도 ‘대학 부실화 조장’의 공동책임을 져야 한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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