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상돈]경선이 최후의 전투는 아니다

  • 입력 2007년 6월 4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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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에 개정된 공직선거법은 정당 내 경선에 대해 몇 가지 조항을 신설했다. 그중 제57조의 2는 정당이 후보자 경선을 실시하는 경우 후보자로 선출되지 아니한 자는 당해 선거에 출마할 수 없도록 했다. 1997년 ‘이인제 사태’의 재현을 막기 위함이다. 지금 한나라당의 대권 주자들이 ‘이전투구(泥田鬪狗)’에 몰입하고 있는 것은 이 조항 때문이기도 하다. 1997년의 ‘악몽’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 보고 마음 놓고 싸움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공직선거법의 이 조항은 지혜롭지 못할뿐더러 헌법에 위반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자발적인 정치 결사체인 정당의 의사결정과 그 구성원의 행동에 대해 정부가 과도하게 개입하는 것은 옳지 않다. 정당은 경선을 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경선을 실시하는 정당에 대해 이런 제한을 가하는 것도 조리에 맞지 않는다. 경선을 했으면 결과에 복종하는 것이 원칙이나, 그것은 법률로 강요할 사안은 아니다. 경선에서 패배한 후보의 독자 출마를 막으면 후보자와 유권자의 참정권을 부당하게 제약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경선 결과가 민심과 다를 수 있어 경선 불복을 나쁘다고 말할 수만도 없다.

서로 헐뜯기 자제해야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 때 민주당 부통령 후보였던 조지프 리버먼은 2006년 상원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고배를 마셨지만, 본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해서 당선됐다. 이라크전쟁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패배했지만, 보수 성향 유권자들의 지지에 힘입어 상원의원에 다시 선출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선 리버먼같이 독립적이며 책임 있는 정치인의 본선 출마가 불가능하다.

공직선거법 제57조의 2의 더 큰 문제는 정치적 리더십으로 해결할 문제를 법적 규제로 해결하려는 데 있다. 정당의 후보자로 선출된 사람이 본선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경선에서 자기와 경쟁한 다른 후보를 포용해야 함은 지극히 당연하다. 1976년 미국 대선 공화당 예비선거에서는 제럴드 포드 대통령과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지낸 로널드 레이건이 격돌했다. 전당대회까지 가서 간신히 승리한 포드는 대통령인 자기에게 도전한 레이건을 좋지 않게 생각했다. 포드가 레이건을 포용하지 못하자 레이건을 지지했던 많은 보수파 당원이 본선에서 기권했다. 포드는 조지아 주지사를 지낸 민주당의 경량급 후보 지미 카터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1980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로 선출된 레이건은 예비선거에서 자기와 경쟁한 조지 부시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당내 화합을 먼저 달성한 레이건은 본선에서 카터 대통령을 압도적 표차로 눌러 버렸다. 대통령에 당선된 레이건은 포드와 부시의 참모로서 자기를 상대로 두 차례나 선거운동을 벌인 제임스 베이커 3세를 백악관 비서실장으로 임명했다. 레이건은 자기를 객관적으로 보좌할 수 있는 베이커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레이건이 미국을 다시 일으키고 소련과 동유럽의 공산체제를 역사의 잿더미에 묻어 버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 같은 ‘포용의 리더십’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개정된 공직선거법 때문에 상대방이 ‘싸움판’에서 뛰쳐나가지 못한다고 보고 진흙탕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 요즘 한나라당의 모습이다. 패자가 ‘싸움판’을 뛰쳐나가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사전(辭典)에 ‘포용’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좌파 세력 앞에선 한없이 작아지기만 하던 이들이 언제부터 이런 투지와 용기를 갖고 싸우게 되었는지도 궁금하다. 하지만 당내 경선에서 이렇게 처절하게 싸우면 패배한 쪽의 지지층은 본선에서 기권하기 마련이다.

실망한 유권자 외면 불러

경선이 최후의 전투인 것처럼 싸우는 것도 그렇지만, 치고받고 하는 사안을 들여다보면 더욱 기가 막힌다. 대통령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운하가 어떻고 페리가 어떻다면서 싸우고 있으니, 외국 신문의 해외토픽 난에 등장할 만하다. 이런 정당을 재선, 보선과 지방선거에서 지지했나 하고 절망하는 유권자가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데도 ‘싸움판’에 갇혀 있는 당사자들만 모르고 있다. 한나라당에 개정 공직선거법은 약(藥)이 아니라 독(毒)인 모양이다.

이상돈 중앙대 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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