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택 칼럼]城을 쌓는 자 못 이긴다

  • 입력 2007년 4월 10일 19시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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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은 깨지는 것이 두려워 바짓가랑이 붙잡고 매달리는 쪽이 진다.” 노무현 대통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팀에 했다는 말이다.

노 대통령은 매사를 이기고 지는 게임의 관점에서 파악한다는 비판을 받지만 이번 한미 FTA 협상에서도 승부사적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는 것이 청와대 측근들의 전언이다. 미국이 일본 중국 유럽연합(EU)에 앞서 한국과 FTA를 맺으려는 뜻이 강함을 감지하고 쌀을 비롯한 민감한 품목에서 마지막 버티기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코스트코 옆에서 건재한 하나로클럽

어떻게 보면 ‘친(親)노조 좌파’라고 불리는 노무현 정부에서 한미 FTA 협상을 타결한 것이 자유무역 반대 세력의 저항을 누그러뜨리고 협정을 안착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말이 ‘뜨거운 얼음’처럼 모순된 말 같지만 ‘먹고사는 문제’ 앞에서는 좌우의 구분보다 유연하고 실용적인 사고가 중요하다.

세계 최대 유통업체이자 세계 최대 기업인 월마트가 한국에서 퇴각한 사례를 보더라도 시장 개방과 국제 경쟁을 두려워할 일만은 아니다. 1999년 유통시장 개방과 함께 월마트가 한국에 1호 매장을 열었을 때 유통업계는 지각 변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겁을 집어먹었다. 그러나 월마트는 작년에 신세계가 좋은 매각 조건을 제시하자 미련 없이 16개 매장을 팔고 한국에서 철수했다. 월마트는 이마트 같은 토종 유통업체에 밀려 한국 시장에서 승산이 없다고 보고 사업을 접은 것이다.

월마트 까르푸가 물러난 나라에서 미국계 할인매장 코스트코는 선전(善戰)하고 있다. 필자는 휴일에 어쩌다 서울 서초구 양재동에 가까이 자리한 농협 하나로클럽과 코스트코를 들를 때가 있다. 코스트코에는 칠레산 포도, 미국산 망고, 필리핀산 파인애플과 제주 한라봉, 성주 참외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세계화는 알게 모르게 우리의 시장 안으로 성큼 들어와 있다. 코스트코에서 9990원에 파는 20피스짜리 초밥 도시락을 들여다보면 먹을거리의 세계화를 실감하게 된다. 페루산 장어, 태국산 초새우, 중국산 문어, 태국산 날치알, 원양(遠洋)에서 잡아온 눈다랑어를 쓴다. 쌀밥만 한국산이다.

한국 농수산업이 결코 죽지 않으리라는 것을 하나로클럽에서 확인할 수 있다. 먹을거리의 토착성과 다양성에서 코스트코는 하나로클럽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귀에 익숙한 산지(産地) 이름이 붙은 농수산물이 넓은 매장을 가득 메우고 봄철 미각을 돋운다.

한미 FTA 협상에서도 개방을 유예 받은 쌀은 농촌의 고령 인구가 자연 감소할 때까지 미루고 버티는 도리밖에 없을 것 같다. 이번 기회에 새만금의 71%를 영농단지로 만드는 개발 계획이 과연 이 시대에 타당한 것인지도 따져 볼 필요가 있다.

한미 FTA가 발효되면 시장 규모에서 EU, 북미자유무역지대(NAFTA)에 이어 세 번째로 큰 자유무역지역이 형성된다. 미국은 세계 수입시장의 21%를 차지하는 최대 시장이다. 시장 개방을 통한 자유무역의 확대는 나라 전체의 경제적 파이를 키우고 소비자의 선택의 폭을 넓히는 효과가 있다. 자유무역은 한쪽에서 국내의 일자리를 파괴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세계 최대 시장과의 통합을 계기로 우리가 하기에 따라서는 전체적으로는 일자리를 크게 늘릴 수 있다.

세계 3위 통합시장이 만들 일자리

세계화 전도사인 토머스 프리드먼은 최근 칼럼에서 글로벌 비즈니스에 종사하는 기업인들의 말을 인용하며 자유무역 국가가 종국에는 국제경쟁에서 이길 것이라고 강조한다. ‘세계 각국의 자원을 활용해 아이디어를 시장의 상품으로 빠르게 바꾸어 놓는 사회가 승리한다.’ ‘성(城) 밖에 삥 둘러 못을 파 놓고 우리가 하는 것을 계속하면서 스스로 세계에서 최고로 영리하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죽게 된다. 우리는 교환하고 무역하는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

인터넷과 휴대용 통신기기로 무장하고 초원을 가로지르는 신(新)유목민의 물결 앞에서 성을 쌓고 해자(垓子·못)를 파는 자는 망하게 돼 있다.

황호택 수석논설위원 hthwang@donga.com

** 황호택이 만난 인생리더 10인 ‘그들에게 길을 물으니’**

꿈을 팔아 기부금 모으는 총장(숙명여대 이경숙 총장)
물처럼 부드럽게 돌처럼 강하게(강신호 전경련 회장)
공민학교 소년이 법무부장관 되다(김성호 법무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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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삶(영화배우 최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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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끌고 가는 힘은 기업에서 나온다(손경식 대한상의 회장)


그들에게 길을 물으니
황호택이 만난 인생리더 10인
지은이 : 황호택
가격 : 11,000 원
출간일 : 2006년 11월 24일
쪽수 : 351 쪽
판형 : 신국판
분야 : 교양
ISBN : 8970904956
비고 : 판매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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