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기타]절이 천년을 곰삭으니 풍경이 되는구나…‘곱게 늙은 절집’

  • 입력 2007년 3월 31일 03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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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순천시 선암사. 흙길과 절, 숲, 스님이 어우러져 고즈넉한 풍경을 연출한다. 사진 제공 지안
전남 순천시 선암사. 흙길과 절, 숲, 스님이 어우러져 고즈넉한 풍경을 연출한다. 사진 제공 지안
전남 구례군 화엄사 구층암의 모과나무 기둥. 사진 제공 지안
전남 구례군 화엄사 구층암의 모과나무 기둥. 사진 제공 지안
◇ 곱게 늙은 절집/심인보 지음/472쪽·1만5000원·지안

갑갑한 도시에서 살다 보면 이유 없이 힘들어지거나 외로워질 때가 있다.

그럴 때 찾아가야 하는 곳이 있다. 현대 문명의 헛바람을 맞지 않고 오랜 세월 ‘곱게 늙어 온’ 절.

절로 향하는 산길은 한적하다 못해 외롭다. 인기척 없는 길에서 한없이 외로운 자연과 대면할 때, 자신의 외로움은 하찮게 느껴지고 묵은 근심은 풀어진다. 삶이 복잡해질수록 자연과 인공이 절묘하게 조화된 절에서 욕심을 비우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진다.

그간 절을 소개한 책이 적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선문답으로 채우거나 건축미를 추상적으로 풀어놓은 책들은 쉽게 접하기 힘들어 아쉬웠다. 디자이너 심인보 씨가 펴낸 절 기행은 절의 기원이 어떻고, 누가 창건했는지 하는 알음은 접어두고 절로 가는 길, 그 길에서 만난 사람, 절과 자연이 어떻게 하나가 됐는지를 서정적인 문체로 오롯이 풀어냈다.

이 책에서 절은 박제된 채 삭아버린 공간이 아니다. 아름답게 나이 먹고, 살아 숨쉬는 곳이다. 그저 곱게 늙도록 놔두는 것이 상책이다. ‘곱게 늙은 절’에 대한 저자의 사랑은 고고한 멋을 해치는 현대의 욕심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드러난다.

“대찰이니 명찰이니 해서 찾아가 보면 여기저기 파헤쳐지고, 시멘트로 덧칠돼 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건축물이 들어서 있고, 분칠인지 분장인지 알 수 없는 흉한 몰골을 보고 어처구니없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저자는 문명을 거스른 듯, 고요와 향기를 지닌 절들을 찾아 나섰다. 전북 완주군 불명산 기슭의 화암사도 그런 곳이다. 저자는 이곳에서 ‘하늘 천장’을 발견한다. 산 중턱의 ‘손바닥’만 한 곳에 화암사가 있다. 이곳에 법당과 누각, 승방과 요사를 지었다. 그냥 다닥다닥 지은 것이 아니라 전각들을 네모꼴로 지어 사방을 막았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마당은 마당이 아니라 집이 되고, 하늘은 하늘이 아니라 지붕이 된다. 사방을 막기 위해 적묵당의 처마 끝이 극락전과 우화루 측면의 풍판(風板)을 뚫고 들어간 광경을 보면 하늘을 천장으로 만들기 위한 기막힌 배치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전남 구례군 지리산 화엄사의 암자인 구층암은 무엇이 건축이고 무엇이 자연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의 경지를 보여 준다. 구층암을 봤을 때 저자의 첫마디. “아! 모과나무 기둥! 아니, 모과나무!” 모과나무를 그대로 옮겨다 기둥으로 만들어 놓았다. 모과나무 밑동이 주춧돌에 뿌리를 내렸다. 연결 부분에 홈을 판 것 외에는 나무 그대로다. 저자는 혀를 내두르며 “산 것과 죽은 것이 다르지 않은 이것이야말로 자연주의 미학”이라고 말한다.

충남 서산시 상왕산 개심사의 심검당(승방)을 마주하고는 “신선한 날 맛, 오직 아는 자만이 알 것”이라며 그 앞을 떠날 줄 모른다. 심검당의 기둥과 보는 ‘휘면 휜 대로 굽으면 굽은 대로 기둥이 되고 보가 됐으며 어떤 놈은 비틀린 대로 위로 치솟고 어떤 놈은 굽은 대로 옆으로 뻗었다’. 나라에서 정한 보물은 공포 양식이 주심포식에서 다포식으로 넘어가는 징검다리격인 대웅전(143호)이지만 저자 자신이 정한 보물은 심검당이라며 능청을 떤다.

저자는 절에 사람이 자꾸 찾아와 구경꾼이 되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시끌벅적 단체관광으로 절 맛을 알까 의심하면서도 많은 이를 천년고찰로 향하게 할 매력적인 책을 펴냈다. 저자가 인용한 안도현의 시가 저자의 양가감정(兩價感情)을 드러낸다. ‘잘 늙은 절 한 채…화암사, 내 사랑/찾아가는 길을 굳이 알려주지는 않으렵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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