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서병훈]‘싸구려 정치쇼’는 국민에 대한 모독

  • 입력 2007년 3월 23일 03시 02분


코멘트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의 악사(樂士)들을 잊을 수가 없다. 생과 사의 엇갈림 속에서 그들은 제자리에 남아 마지막 연주를 했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의 멜로디 속에서 떠오르는 모습, 그것은 바로 영웅의 얼굴이었다.

영화 같은, 아니 영화 못지않은 현실도 있다. 드물지만 영웅은 분명 존재한다. 자기를 던져 세상을 구하는 의인들이 있기에 세상 살맛이 나는 것이다. ‘9·11테러 사건’으로 미국 사람들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상처가 크면 희망에 대한 염원도 간절해지는 법이다. 탈출구를 찾고 싶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은 구출 작업을 벌이다 장렬하게 순직한 343명의 소방대원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품고 있다. 루돌프 줄리아니 뉴욕시장 등은 철수 명령을 뿌리치고 자발적으로 사지(死地)에 뛰어들었다며 그들의 희생정신을 높이 찬미했다. 감동의 물결이 이어졌다. 미국 시민들은 이런 무명 영웅들의 미담을 통해 자신감을 되찾았다. 국가에 대한 애국심도 새롭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진실은 다른 데 있었던 모양이다. 2005년 9월 법원의 명령에 의해 공개된 생존 소방대원들의 증언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숨진 소방대원들은 자신의 목숨이 경각지경에 이른 것을 모르고 있었다. 당장 철수하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하는 상관의 명령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들은 원치 않는 희생을 강요당했던 것이다. 1만2000쪽에 달하는 보고서는 이 모든 사실을 생생하게 들려준다. 미국 시민들이 겪어야 할 허탈감은 상상하고도 남는다.

‘선의’ 내세운 거짓 언젠간 들통

최근 우리 역사학계도 비슷한 고민에 빠져 있다. 우리 선조들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술을 지녔다는 통설을 부정할 수도 있는 증거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국보 제126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세계에서 가장 오랜 목판인쇄물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자칫하면 최고(最古) 목판 인쇄술의 영광을 일본에 넘겨주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국립박물관이 진실의 실체에 대한 해석과 공개를 놓고 고민할 법도 하다.

우리나라의 청동기 역사를 1000년 이상 끌어올리는 내용을 교과서에 담으려는 움직임도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일부 학자들은 한반도 청동기 문화의 시작을 기원전 20세기로까지 소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이 그렇다면 중국의 무리한 역사 공세에 맞설 수 있는 호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다수의 학자들은 생각이 다르다. 우리마저 역사를 왜곡해서는 안 된다는 견해다.

이쯤에서 ‘진실이 뭐기에’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진실은 불편할 때가 많다. 때로는 큰 아픔을 주기도 한다. 그렇다면 굳이 진실을 찾아서 밝힐 필요가 있을까. 현실의 삶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진실을 적당히 가공해서는 안 될 이유가 무엇인가. ‘선의의 거짓말’이 필요할 때도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확실한 것은, 진실이 언젠가는 자기 얼굴을 드러내고 만다는 점이다. 사필귀정이라는 말이 그냥 생긴 것이 아니다. 진정한 영웅을 위해서도 엉터리는 솎아내야 한다. 경우에 따라 선의의 거짓말도 필요하다. 그러나 민주시민으로서 우리는 그런 배려를 거부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국가는 이성을 갖춘 시민에게 진실을 알리고 진실로 대접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다. 뿐만 아니다. 진실을 가볍게 여기면 편법이 횡행하게 된다. 진실의 소중함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어지러울 수밖에 없다.

당장 힘들어도 떳떳함이 최고

다라니경이든, 청동기 역사든, 아직 어느 쪽 주장이 맞는지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가 진실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그 역량이 성숙했다는 사실이다. 당장은 아플지 몰라도 백배 천배 보상해 주는 것이 바로 진실게임이다. 이런 믿음이 확산되고 있다는 것,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또다시 정치판이 요동치고 있다. 결국은 거품이 될 것이 분명한데 다들 허황된 꿈에 정신을 잃고 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면서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이러니 4류 정치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진실을 찾고 본질을 지향해야 한다. 우리 사회의 기초체력을 길러야 한다. 그래야 이 ‘싸구려 정치 쇼’가 사라질 것이다.

서병훈 숭실대 교수·정치외교학과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