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엽]마드리드에서의 실망

  • 입력 2007년 2월 27일 19시 43분


최근 스페인 마드리드로 출장을 다녀왔다. 스페인 하면 피카소 가우디 카르멘 돈키호테 투우, 그리고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이 떠오른다. 처음 가는 곳이라 기대가 커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경유하는 18시간(편도)의 여정도 피곤한 줄 몰랐다.

하지만 실망이 앞섰다. 무선인터넷도 ‘참을 인(忍)’자 인터넷이었고, 영어로는 소통이 거의 안 됐다. 우리 일행을 안내하던 버스 운전사는 “학교에서 영어를 배웠는데 신통찮다”면서도 외국어를 굳이 배울 필요가 있느냐는 표정이었다. ‘아블라 잉글레스(영어 할 줄 아세요?)’ 등 스페인어를 몇 마디 배워 간 기자가 오히려 머쓱했다. 그들이 스페인어 사용 인구가 영어 중국어 다음으로 많다는 자부심을 즐긴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불친절’도 뜻밖이었다. 마드리드의 공항에서 서울로 전화를 걸려고 공중전화를 들었지만, 서너 단계의 지시문이 모두 스페인어였다. 눈치껏 해 보다가 안 돼 10여 m 떨어진 안내 데스크의 중년 여성에게 물었더니 공중전화가 시키는 대로 하란다. 스페인어를 모르니 직접 가르쳐 달라고 몇 차례 부탁했지만 고개만 가로저었다. 다시 인근 메트로(지하철) 안내실로 가서 같은 부탁을 했지만 그곳의 젊은 여직원들도 곧 점심시간이라며 거절했다. 이후 공항 안에서 5명에게 물어본 뒤 전화를 걸 수 있었다. 허탈하게도, 00에 이어 국가번호(82)만 누르면 됐는데….

일행 중 두 명이 호텔 로비에서 도둑을 맞았다. 한 분은 ‘백남준 작품’의 설비를 맡은 전문가인데 체크인하는 동안 발밑에 둔 지갑과 노트북 컴퓨터가 들어 있는 가방을 누군가가 들고 가 버렸다. 항의를 받은 직원은 ‘짐을 조심하라’고 쓴 경고문을 가리킬 뿐이었다. 더 황당했던 일은 한국으로 카드 분실 신고를 했더니 “미국에서 결제 신청이 들어왔다. 미국에 있느냐”고 묻더라는 것이다. 국제 범죄 조직의 소행이었던 것이다.

또 다른 분도 같은 호텔에서 핸드백을 의자에 뒀다가 도둑맞았다. 가방이 없어진 직후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고 뛰어 나갔으나 바람잡이꾼 때문에 놓쳤다고 했다.

마드리드는 문화적으로 풍요로웠다. 프라도 미술관을 비롯해 ‘게르니카’를 전시하는 소피아국립예술센터 등이 관람객으로 붐볐다. 한국 측이 마련한 ‘백남준전’도 관객들이 줄을 이었다. 국빈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미술 전시장을 찾은 후안 카를로스 국왕이 어린이의 코를 살짝 만지는 대목에선 국민과의 교감도 느낄 수 있었다.

일상도 ‘웰빙 라이프’였다. 오후에 ‘시에스타’(낮잠)가 있고 저녁식사도 오후 9시 넘어 시작해 늦게까지 이어진다. 세계은행 집계(2005년)에 따르면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2만5360달러로 한국(1만5830달러)보다 높다. 부럽지 않을 수 없었다. 유학생 서나영 씨는 “배낭여행을 왔다가 한국보다 편하고 경쟁이 치열하지 않아 유학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마드리드에 대한 실망이 싹 가시지 않는다. 지난해 여름 스페인을 다녀온 후배도 “바르셀로나에선 안 그랬는데 유독 마드리드에선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더욱이 기자는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웰빙 라이프를 즐기는 ‘문화인’들이 늘어나면 도시의 품격도 높아질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마드리드에서의 경험으로 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 듯하다. 문화와 도시의 품격은 상관관계가 없는 것일까.

허엽 문화부 차장 h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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