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정종섭]정치판에 의리가 사라졌다

  • 입력 2007년 2월 21일 02시 58분


이사(李斯)는 진시황 때 황제 통치에 앞장섰던 법가(法家)의 대표적 인물이다. 초나라 사람인 그는 진나라에서 출세한 후 분서갱유(焚書坑儒)에 앞장서 시서(詩書)를 불태운 다음 가혹한 형법으로 백성을 잔혹하게 억압하며 진시황을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둘렀다. 간이 배 밖에 나온 그는 진시황이 죽자 그 죽음도 숨긴 채 조칙을 위조하여 태자인 부소(扶蘇)를 죽이고 막내 호해(胡亥)를 세우는 짓까지 저질렀다. 나라가 혼란해지자 사람들은 옛날 그가 유생 460명을 생매장했던 함양(咸陽) 시장터에서 그를 죽이고 삼족(三族)을 멸하여 그 족속을 지구에서 영원히 없애 버렸다. 그래서 오늘날 이사의 자손은 이 지구상에 없다. 간악한 자에 대한 응징이다.

정치를 보는 관점으로는 현실주의와 이상주의가 있다. 현실주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만 잡으면 되고, 의리(義理)고 명분(名分)이고 원칙이고 할 것 없이 필요하면 언제나 버리거나 취하면 되고, 이기적 욕심으로 움직이는 인간은 철저히 권력과 돈으로 다루면 된다고 본다. 이상주의는 추구하는 가치와 이상을 먼저 분명히 하고, 이에 합당한 것만 행하고 그렇지 않으면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이란 권력이나 돈 이전에 추구하는 가치가 중요하며, 그에 따라 삶의 원칙이 있다고 본다.

난파선 빠져나가기 급급

현실에서 사람들은 이를 양 축으로 하여 그 사이에 생기는 다양한 스펙트럼 가운데 어떤 지점을 선택하여 행동한다. 그런데 극단을 배제하더라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나라의 운영과 인간의 행동에는 먼저 추구하는 가치가 있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원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현재까지 많은 사람이 택하고 있는 방향이다. 그래서 나라와 남이야 어찌 되었든 자기 잇속만 챙기며 여기저기 붙어먹고 사는 이를 속된 말로 ‘양아치’라고 부르며 저급하게 취급한다.

현 정권이 막을 내릴 시점이 다가오자 정치권이든 지식계든 한때 권력의 단물을 빨아먹으며 권세를 휘두르던 자들이 다들 창을 거꾸로 잡고 대통령을 비난하며 난파선에서 빠져나가기 바쁘다. 대통령의 권력을 등에 업고 한 시절 자기 지위를 보전하고 출세하고 국회의원 자리를 유지하던 사람들이 정권 끝물이 되니, 노무현 대통령은 처음부터 대통령 할 자질이 없는 사람이었다거나, 자기들은 잘했는데 대통령이 죽을 쑤어 나라가 이 꼴이 되었다며 돌팔매질하고 자기 살길 찾기에 바쁘다.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정당을 만드는 것이 한국 정치의 저급성을 보여 주는 것임에도 100년 갈 정당이라고 호언장담을 하더니 또 정당을 만든다느니 정당을 옮긴다느니 하며 분주하다. 그중에는 또다시 고질적인 지역주의를 부추겨 눈속임을 하려는 자들도 나타나고 있다. 각자 내거는 변명도 다양하다. 승리의 전술이라느니, 일보 후퇴라느니, 태종의 방법이라느니 희한한 이야기를 가져다 붙인다.

정치판은 이렇다 치더라도 지식인도 그에 못지않다. 학문의 당파성이니 뭐니 하며 내걸더니, 그 다음에는 학문권력을 위한 투쟁을 하고, 그에 따른 권력과 돈의 맛을 보더니, 이제는 아예 권력과 돈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붙으려고 한다. 이 정부에서 한자리하고 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힘쓰고 으스대던 사람들이 이제는 공격의 화살을 현 정부에 돌리면서 대통령과 이 정부가 자기 말을 듣지 않아서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다고 목청을 높인다. 그러면서 다시 기생할 다른 숙주를 찾아 나서고 있다. 지식인이 나랏일이나 정치에 참여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원칙도 없이 정상배들이 하는 짓이나 한다면 시정잡배와 하등 다를 바가 없다.

권력 단맛 본 지식인도 똑같아

이사의 짓은 워낙 못된 것이어서 후세에도 교훈이 되었다. 그래서 당나라 시인 이업(李업)은 ‘어둠을 속이는 것도 옳지 않은데 밝음을 속였으니 죽어 마땅하다. 한 사람의 손으로 천하의 눈을 가리기는 어렵다(欺暗常不然, 欺明當自戮, 難將一人手, 掩得天下目)’고 읊었다. 세상의 일과 사람의 일에는 대의(大義)와 명분이 있어야 하고,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의리와 절의(節義)를 가져야 한다. 이 정부의 말로와 한 손으로 태양을 가리려는 자들의 모습을 보는 마음이 실로 편치 않다.

정종섭 객원논설위원·서울대 교수 jschong@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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