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민 칼럼]집권 마지막 해, ‘남는 장사’하려면

  • 입력 2007년 2월 19일 19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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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우리에게 3개월의 시한부 삶이 주어진다면 가장 현명하게 죽음을 맞는 방법은 무엇일까. 실제로 그런 상황에 처했던 미국 굴지의 회계법인 회장 ‘유진 오켈리’라는 사람은 얼마 전 그 3개월을 책(‘인생이 내게 준 선물’)으로 펴내 이승에 모범답안을 남기고 떠났다. 치열하게 삶을 이뤄 조직의 정상에 오른 쉰셋의 나이에 악성 뇌종양으로 90여 일의 잔여 생명을 선고받았지만 그의 인생은 오히려 이때부터가 그 이전 50여 년보다 더욱 빛을 발한다. 그는 과거의 잔상에 미련을 갖거나 생명에 집착하지 않고 놀라운 자기 통제력으로 나머지 삶을 설계하고 실천한다. ‘죽음을 가장 건설적 경험으로, 인생 최상의 경험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고 믿고 생을 지극히 이지적으로 마감한 것이다.

이 사례는 그처럼 시한부 삶을 사는 환자들이나, 정년을 아주 짧게 남겨 놓은 직장인, 혹은 만기가 다가오는 임기직 공직자들처럼 ‘그곳’에 머물 시간이 제한적인 많은 사람들에게 자리를 올바로 정리하고 떠나는 지혜를 제시한다. 떠나야 하는 고통은 같지만 이들 세 부류의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통증의 성격은 서로 다르다. 말기 암 환자에게는 죽음의 공포가, 정년퇴직 예정자에게는 노후생활의 걱정이, 그리고 공직자에게는 권력을 내놓은 후의 허망함이 고통스럽게 상상될 것이다.

묘안 없으면 순응이 차선

공직 중에서도 최고 권력인 대통령 직을 물러나야 하는 사람에게는 레임덕으로 인해 나타나는 환경 악화가 우선적으로 극복되어야 할 고통이다. 한국처럼 정치 수준이 과히 높지 않고 국민 정서가 특이해 지도자에게 크게 기대했다가 쉽게 실망하는 풍토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역대 어느 대통령은 레임덕을 피할 수 있는 묘책을 찾아오라고 해외에 연구진을 파견하기도 했지만 결론은 신통치 않았다. ‘묘안이란 없으며 레임덕을 언급하지 않고 또 의식하지 않고 사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이었다.

생로병사(生老病死)처럼 레임덕 역시 순응해야 할 정치적 운명의 한 과정이지만 모든 권력자들은 그걸 거부하고 싶어 한다. 노무현 대통령 역시 그 평범한 진리에 동의하고 싶지 않은 모습이다. 임기 말년에 장기정책들을 쏟아내는 것은 혹 시간의 흐름에 저항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수확할 계절에 씨를 뿌린다고 해서 봄이 다시 오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권부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더욱 거칠어진 것 역시 정권이 느끼는 레임덕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짐작하게 해 준다. 자기방어적 공세로 계속 논쟁의 중심에 서고 정국운영의 주도권을 쥐려 한다고 해서 레임덕이 사라져 줄 만큼 고분고분한 존재는 아니다.

노 대통령은 심지어 ‘국민의 지지를 포기했다’고까지 말했는데 만일 그가 핵으로 세계를 위협하는 북한의 김정일이 아니라 그를 뽑아 준 우리 국민에게 ‘다 줘도 남는 장사’라며 진작 마음을 열었다면 지지율이 이렇게 포기할 정도로 낮아졌을까. ‘포기’라는 단어는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부모가 자식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고 자식이 부모에 대한 도리를 포기하는 것은 혈육 간에 할 일이 아니다. 상대를 포기한다는 것은 극단적 행동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차피 포기했으니 비판에 응어리진 감정이나 풀고 가겠다는 것보다는 실정으로 고통받은 사람들에게 속죄하고 증오했던 사람들과 화해한 다음 떠나겠다는 자세가 끝 인상이라도 좋게 하는 길이다.

국민이 할 일도 하나 있다. 비록 그가 국민을 포기했다지만 성숙한 국민은 대통령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언급하기조차 지쳤다는 사람도 많지만 국민은 노 대통령이 바르게 마감할 수 있도록, 참여정부가 요즘처럼 ‘졸업반’에 걸맞지 않은 정책과 언행을 할 때마다 그들이 옳은 궤도로 돌아오도록 선의의 비판을 계속해야 한다.

끝 인상이라도 좋게 해야

닷새 후면 출범 4년이 되는 정권에 지난 세월이 국민과 함께 나라를 다시 세운 영광의 나날이었는지, 아니면 치열하게 여론과 싸우느라 지친 고난의 기간이었는지는 자신들이 잘 알 것이다. 쉬워 보이진 않지만 노 대통령이 퇴임을 그의 정치 역정에서 ‘가장 건설적 경험, 최상의 경험’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지는 앞으로 1년 그가 하기에 달렸다. 남은 1년에는 노 대통령이 더는 ‘밑지는 장사’를 하지 않기 바란다.

이규민 大記者 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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