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정성희]‘루아얄 포퓰리즘’

  • 입력 2007년 2월 13일 19시 55분


프랑스에선 우리나라와 같은 ‘몰래카메라’는 없지만 ‘몰래라디오’가 있다. 코미디언으로 하여금 신분을 속이고 유명 인사에게 전화를 걸어 사회적 쟁점이나 일상사에 대해 의견을 물어 보게 한 뒤 이를 그대로 내보내는 것이다. 사회 지도급 인사들의 평소 ‘내공’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이 프로그램에 프랑스인은 열광한다. 프랑스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노리는 사회당 후보 세골렌 루아얄을 곤경에 빠뜨린 것도 몰래라디오였다.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과 축구선수 지네딘 지단 등도 속여 넘긴 제랄드 다앙이라는 코미디언은 지난달 루아얄에게 전화를 걸어 영어식 억양의 프랑스어로 자신이 캐나다 퀘벡 주의 장 샤레 총리인 것처럼 속이고 11분간이나 통화했다. 다앙은 코르시카 독립 운운하며 너스레를 떨었고, 루아얄은 여기에 넘어가 “퀘벡 독립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야 말았다. 캐나다는 물론 프랑스 국민까지도 어리둥절하게 만든 실수였다.

▷‘이미지만 있고 콘텐츠가 없다’는 평가를 받는 루아얄이 최근 100개의 선거공약을 내놓았다. 국가가 보조금을 지급하는 주택 12만 채 건설, 최저임금 인상, 저소득층 퇴직연금 5% 인상과 무이자 대출 확대, 사회적 일자리 50만 개 창출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재원 마련 방안이나 액션플랜은 어디에도 없다. ‘주 35시간 근무제’를 고쳐 근로시간을 늘리도록 하겠다던 것도 바꿔 이를 유지하겠다고 선언했다.

▷그의 공약은 사회주의적 복지 모델의 재탕으로 저소득층과 만성 실업에 시달리는 20대 젊은 층을 겨냥한 것이다. 인터넷에 능숙하고 기득권층에 불만이 많은 청년들을 사회당 지지층으로 끌어들이자는 전략이다. 국립행정학교(ENA) 동기인 프랑수아 올랑드 사회당 제1서기와 동거하면서 4명의 자녀를 낳은 루아얄은 형식보다는 실존(實存)을 중시하는 다분히 ‘프랑스적’ 인물이다. 그동안 모호한 태도를 취하던 그가 선거를 앞두고 던진 승부수가 이처럼 ‘좌파로의 복귀’이다. 4년 전 우리 대선을 보는 듯하다.

정 성 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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